라디오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16년 지기 다정한 친구다.

초등학교 3학년때 엄마가 내게 영어 리스닝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카세트 테이프 기능이 있는 라디오를 사준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라디오가 생기자마자 영어 테이프를 듣기는커녕, 매일 저녁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저녁 8시쯤 하는 이지훈의 영스트리트와 이의정의 FM 대행진을 즐겨들었다. 어머니가 라디오 듣는 것을 싫어하자, 라디오에 이어폰을 껴놓고 몰래 듣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니 조금 머리가 컸다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라디오를 듣게 됐는데, 우연히 접하게 된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통해 라디오에 푹 빠지게 된다. 새벽3시에 끝나는 고스트 스테이션을 듣고 자면 학교에 가서는 수업시간에 항상 졸았기 때문에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라디오 듣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내가 ‘라디오 키드’라는 자각을 했고, 라디오를 듣는 행위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고3때도, 대학에 들어와서도, 군대에 가서도, 복학생이 될 때까지도 라디오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고백해서 차이고 울면서 버스를 탔을 때도, 고참한테 입에 담을수도 없는 욕을 먹고 난 뒤에도, 첫 키스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도 나는 라디오를 들었다. 어느새 라디오는 나의 기쁨과 슬픔마저 함께 나누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소속감’

앞서 라디오를 ‘친구’라고 말한 이유는 찾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있을뿐더러, 라디오가 사람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단순히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방송을 수동적으로 청취자들이 듣는 시스템이 아니라 디제이와,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울고 웃는 다양한 청취자들이 방송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디제이는 단순히 진행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청취자와 유대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일상과 굉장히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지게 된다. 각 디제이들마다 청취자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르고, 그 유대관계가 방송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되된다. 그래서 동일한 포맷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짜더라도, 디제이에 따라서 방송의 성질이 확 달라지는 것이 라디오다. 따라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디제이가 바뀔 때 청취자들은 단순히 진행자가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제이와 청취자들끼리 맺었던 유대관계도 끝나면서, 그 프로그램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다.

강한 소속감을 주는 방송으로 유명한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위에서 말한 라디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소속감’이다. 좋은 라디오 방송은 청취자들이 갖고 있는 ‘소속감’이 굉장히 강하다. 디제이와, 디제이를 중심으로 모인 청취자들이 라디오를 듣는 순간만큼은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며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소속감이 높으면 높을수록 라디오 프로그램의 질은 높아지는 것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유독 가족, 시민, 식구 등의 집단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전부 ‘소속감’을 위해서다.

그런데 디제이가 불합리하게 잘려나가면서, 한 방송의 '소속감'이 외부에 의해 이유없이 침해당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얼마 전 벌어진 윤도현 퇴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우용 본부장이 이끄는 MBC 라디오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금 MBC 라디오는 강한 ‘소속감’을 만드는 좋은 방송을 만들 환경이 전혀 아니다. 디제이가 갑자기 잘리고, 그 과정에서도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받을 뿐, 일선 PD의 의견은 방송국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데 어떻게 ‘소속감’을 생각하며 방송을 만들 수 있겠는가?
 

MBC 라디오를 망치는 이우용 본부장

이우용 본부장은 MBC 라디오의 5월 개편 때도 안팎으로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를 8년동안 진행하던 김미화가 KBS 블랙리스트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외압’에 의해서 물러나게 되었고, 김미화가 물러난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 김흥국도 정몽준 의원 측 선거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잘라버렸다. 또한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뉴스브리핑을 담당한 김종배 시사평론가 역시 5년전 조선일보에 소송당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이런 사례만 보면 이우용 본부장이 단순히 MB-김재철의 정치적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우용 본부장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적으로 편향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현 정부 눈치만 보는 사람이었다면 김어준과 신해철 같이 현정부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디제이로 새로 기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우용 본부장의 가장 큰 문제는 MBC 라디오국을 굉장히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봄 개편 당시 라디오 PD들은 개편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다. 이우용 본부장이 부장단과 모든 개편안을 밀실에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입사 25년차 PD들이 “입사 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말할 정도로 PD들과 디제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 않고 개편을 했다. 그러다보니 이진 아나운서의 주말 뉴스시간대와 라디오 디제이 시간대가 겹치는 해프닝도 생기는 등, 졸속으로 개편안이 짜여졌다.

개편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개편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된 디제이들도 개편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10시 에 “꿈꾸는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던 유상무, 유세윤, 장동민은 디제이에서 물러나기 전에 자포자기식의 방송을 해버리고, MBC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 표출도 서슴지 않았다. PD와 디제이와 방송국에서 잘 협상이 된 이야기라면 그들이 구태여 ‘뒤끝있는 퇴장’을 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주연 아나운서는 ‘이주연의 영화음악’이 새벽 2시에서 3시로 밀린 것에 대해 ‘이주연의 영화음악’ 게시판에서 직접적으로 섭섭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번에 디제이에서 물러나게 된 윤도현 역시 소속 기획사의 성명을 통해 MBC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DJ 윤도현에 대한 그 어떠한 배려가 없었음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라며 “개편을 빌미로 삼아 이러한 제작 관행이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일선 제작 PD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제작자율권이 위축되는 현재 MBC의 행위에 대해 항의의 의미를 담아 이글을 올린다”고 하였다. 사전에 어떤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물러나라고 말한 것이 윤도현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2시의 데이트는 다른 디제이(주병진)가 들어와야 하니까, 다른 방송시간대로 옮겨서 방송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제안받은 프로그램중에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들어있다는 것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은 국내 최장수 팝 프로그램으로서 이미 전설이 된 프로그램이다. 윤도현에게 음악인으로서도 선배인 배철수의 방송을 해보라고 제안한 것은, 윤도현에게는 조롱이며, 배철수에게는 모욕일 수 밖에 없다. MBC 라디오의 주요 프로그램을 맡고있는 방송 디제이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결국 주병진도 디제이직을 고사하면서 MBC 라디오는 망신을 자초한 셈이 됐다.


MBC 라디오, 더 이상 추락하면 안된다

물론 방송 편성이나, 디제이를 발탁하고 바꿀 권리는 원칙적으로 방송국에 있다. 그러나 권리는 합리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일선 라디오 PD들과 디제이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독단적으로 디제이를 갈아치우는 행태가 과연 MBC 라디오를 발전시키는 길일까? 이우용 본부장은 저번 봄 개편때 “FM4U 다음 개편 때는 진행자 확 바꾸겠다.”는 반 협박성 말까지 했다고 한다. PD의 의견이 윗선에 반영되지도 않고, 디제이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소속감’ 강한,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겠는가?

심지어 돌려막기 식으로 디제이를 기용한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무섭다. 라디오의 질을 좌우하는 ‘소속감’이 강하게 드는 프로그램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PD와 작가, 그리고 디제이가 자율성을 보장받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가야만 창의적인 컨텐츠도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디제이가 방송을 장악할만한 힘을 가지게 되어, 그를 중심으로 청취자들이 소속감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지금 MBC 라디오에는 철학이 없다. 라디오는 TV프로그램이 아니다. 유명한 사람을 디제이로 기용한다고 해서, 변화를 많이 준다고 해서 청취율이 갑자기 올라가지 않는다. 이우용 본부장이 “얼마나 더 청취자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얼마나 인기를 끌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면 먼저 라디오를 만드는 PD나 디제이를 소모품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을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한, MBC라디오와 청취자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라디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MBC 라디오의 애청자로서, MBC 라디오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