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이념논쟁이 벌어졌다. 지난 19일, 교육과학기술부가 새 역사 교과서 편찬을 위해 조직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 20명 중 8명이 교육과정 고시(告示)에서 교과부가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란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했다며 불만을 표시하고 사퇴한 것이 발단이 됐다. 여기에 같은 날 교과부 국정감사 도중, 한나라당 박영아 의원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다면 북한에 가서 국회의원 하라.”는 발언을 하자, 여야 간 주고받음이 본격화되면서 순식간에 언론계와 학계로 ‘민주주의 설전’이 퍼지게 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논란으로 파행된 교과부 국정감사 @뉴시스

 

여당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헌법에도 명시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만큼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인 반면 야당은 ‘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좁은 범위의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면서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를 배척하려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정치권의 이념 논박은 언제 들어도 지루하고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수십 년 전에 그쳤어야 할 것을 물고 늘어지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이념’이란 결코 완전하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세기 동안 정치와 경제 분야에 있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은 수없이 많았다. 때에 따라 그것이 곧 절대적 진리인 듯 보여 다수에 의해 숭배되다시피 하던 이론도 많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며 어떤 것도 무결(無缺)하지 않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대척점에 서 있던 이론들이 다른 요소를 받아들이며 융합되는 등 상호보완의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변형돼 왔다.

문제가 되는 자유민주주의자들-자유민주주의자 전체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면 옛 소비에트 연방이나 북한을 지지하는 빨갱이라는 주장을 펴는데, ‘자유민주주의’ 대신 상위개념인 민주주의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빨갱이라 몰고 가는 것은 실소가 터질 정도로 근거가 빈약한 억지다. 자유를 싫어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리고  구소련과 북한은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신들이야 나라이름도 떡하니 ‘민주’라는 명칭도 갖다 쓰는 만큼 분명한 민주국이라 주장하지만 두 나라 모두 국민에게 주권은 없었다. 현대 민주사회의 꽃이라 할 만한 대의민주제도가 없었으니 국민의사가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고 독재자가 종신집권에 가까울 만치의 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차라리 신(新) 왕정이라 하는 것이 옳다.

또, 사회민주주의가 공산권 국가들이 추구한다는 ‘인민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은 누구의 판단인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체제인가.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이란, 국민에게 사람이면 사람답게 기본적인 생활수준으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단순히 자유만 보장하는 것으로 그치면 된다는 입장인 것인가. 국가가 힘없는 국민을 보듬어주지 못할 때의 결과를 알면서? 그러므로 ‘민주주의’용어 옹호자들이 ‘사회민주주의’까지도 품어야 한다는 말을 해도 괜히 앞서나가 친북, 공산주의 굴레를 씌워선 안 된다.  만약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인 이 ‘사회’는 중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 텐가. 정말 ‘자유’가 어떤 가치보다 위에 서 있는 만고지선(萬古至善)의 가치라고 거침없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교과서 개정시안 예시▲출처 - 중앙일보



‘민주주의’ 용어를 주장하는 세력도 마찬가지다. ‘자유’는 현대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그들은 또 다른 가치인 ‘평등’ 역시 중요한데 왜 자유만 내세우냐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는 가치의 무게가 달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명시 여부가 달라진다. 평등과 자유 모두 그 개념 자체는 매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란 단순히 원하는 물건을 사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수준의 기본적인 자유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그 ‘자유’를 뜻한다. 

'자유'는 이전의 봉건계급사회와 대비되는 시민사회의 특징이다. 그냥 원리 원칙적으로 해석하면 될 것을, “그 자유가 신자유주의 아니냐, 무한경쟁 자본주의 아니냐, 과거 진보세력을 억누르던 70년대식 개발독재시대의 온상 아니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비난하는 세력들의 억지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한마디로 양자 모두 오십보 백보다. 괜한 것을 트집 잡고, 도저히 대치시킬 수 없는 가치들을 저울에 매달아 더 무거운 것을 찾으려고 하니 당연히 논리의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2011년에 1970년대식(50년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념 논쟁이라니, 세월이 그다지도 흘렀건만 정치인들은 지난 역사에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나 보다. 다른 것도 아니고 피비린내 나는 이념전쟁(한국전쟁)을 직접 치른 이 나라에서 말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나간 일을 통해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가 이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뻔히 알면서 왜 배타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하지만 ‘이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사회에서 격리될 수 있겠는가. 지배자들이 이념을 통치의 도구로 오·남용 하면서 국민들이 하도 데인 탓에 정치론과 결부된 이념 논쟁이 신물 나는 것일 뿐, 어떤 가치와 진리를 좇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인간문명의 진보 원동력이지 않은가? 이념은 곧 철학이다. 철학을 사유(思惟)하는 것은 생각 하는 동물인 인간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념 논쟁, 해도 좋다. 다만 이번 일과 같은 낡은 이념 논쟁은 하지 말라. 현재 국내외 안팎으로 도저히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 때문에, 정부실패니, 시장실패니 말이 많다. 종전의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이론들이 의심받고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차라리 우리가 설전해야 할 이론 싸움은 이것이다. 정치적 이해득실이건, 경직된 신념의 이유에서건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로 아직도 싸운다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수준미달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동서장벽이 무너지고 냉전구도가 와해된 시대를 산, ‘탈이념화된 세대’이다. 정치인들에게 충고하건대, 앞으로 권력을 잡고 싶다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할 집단의 특성부터 헤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재 2·30대들은 이번 이념 논쟁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자유민주주의여도 상관없고 민주주의여도 상관없는데, 또 시작이냐는 반응이다. 기성정치인들은 "개념을 잘못 쓰면 자라날 세대가 왜곡된 사관을 교육받는다." 라는 생각이지만, 50·60대와 10대의 사고방식이 같아서야 되겠는가. 자라날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이분법과 배척의 논리가 아닌 유연하고 수용적인 사고방식이다. 몇 십년전의 경직된 사관을 후대에도 물려주려는 그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오래 전에 끝냈어야 할 해묵은 논쟁을 들추어내는 것은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산적한 과제부터 처리할 생각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