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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는 그다지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다. 오페라에 대한 보편적 인식은 선뜻 다가가기 어렵고, 왠지 지루할 것 같고 경제적으로 넉넉해야 즐길 수 있는 고상한 예술로 정의된다. 그러나 오페라에 대한 편견이나 막연한 거리감은 이제 떨쳐버리자. 오페라라는 극의 이야기는 오히려 영화․드라마보다 단순하고 통속적이다. 오페라는 절대 다수 작품이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이토록 쉽고 친근한 주제가 또 있을까. 게다가 오페라는 성악곡으로 진행되는 장르다. 대중가요로 기호가 치우쳐 진 요즘 같은 시대에 클래식 음악은 무겁고 따분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가사 없이 수 십 분을 오로지 악기의 소리로만 흘러가는 기악곡에 비해 사람의 목소리가 주도하는 성악곡은 비교적 지루함이 덜하다. 헌데 오페라의 성악곡은 보통의 가곡처럼 하나의 독립된 노래가 아니라 극을 구성하는, 그것도 굉장히 극적인 극을 구성하는 노래다. 인물의 절절한 이야기와 사연을 담고 있는 연극의 대사와 같은 곡이라면 흡입력이 클 수밖에 없다. 직접 공연장에서 관람한다면 체감할 수 있는 오페라의 매력은 더욱 배가된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는 주옥같은 아리아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이나 분위기 전환을 위한 효과음마저도 압도적으로 만든다. 그러니 오페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말고 그냥 즐겨라. 문화는 본래 유희니까. 딱 극장에서 영화 볼 때의 집중력만 가져도 부담 없이 오페라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주세페 베르디인데, ‘나부코’,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맥베스’ 등 무수한 걸작을 탄생시킨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작곡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페라에 관심을 가진다면 가장 자주 접할 작곡가 역시 베르디다. 베르디의 작품은 여러 명(名) 오페라 중에서도 특히 세속적이며 극적이라, 꼭 tv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지난 10월 29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가면무도회’는 베르디 음악인생의 중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국왕 리카르도는 충신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아를 사랑한다. 아멜리아 역시 마음속으로 리카르도를 흠모하지만 금기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지우려 한다. 그러나 끝내 아멜리아와 리카르도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게 되고 레나토에게 그것을 들킨다. 레나토는 주군과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며 배신감에 반역자들과 모의하여 리카르도를 죽이려 한다. 마침내 리카르도의 죽음을 예고하는 가면무도회는 시작되고 가장한 리카르도에게 권총을 발사한 레나토는 아멜리아의 순결을 주장하며 용서하겠노라는 리카르도의 말에 괴로워한다. 리카르도가 점점 스러지며 막이 내린다.

위기와 음모와 절망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야기에 걸맞게 음악 역시 시종일관 몰아치듯 정열적이다. 통상 오페라의 남녀주인공은 각 성별로 가장 높은 음역인 테너와 소프라노가 맡는다. 예외적으로 메조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극을 이끌어가기도 하는데(베르디가 특히 바리톤 중심의 오페라를 발전시켰다.) 가면무도회의 주인공은 공식대로 비극적 연인 사이인 ‘리카르도’와 ‘아멜리아’가 맞지만 아마 관객이 가장 감정이입하는 인물은 레나토일 것이다. 실제로 이날 공연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아리아는 레나토 역의 바리톤 고성현이 부른 Eri tu che macchiavi quell'anima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였다. 낮지만 맹렬하게, 절제되었지만 끓어오르듯 분기를 토해내는 이 대목에서 대다수 관객이 아내와 군주에게 배신당한 치욕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레나토에게 동조하는 듯 보였다. 초반에는 각 인물들의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독창곡이 주를 이루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상반된 인물의 처지와 심경을 대비시키기 위해 중창이 많아진다. 레나토 일당의 음모가 모의되고 서슬 퍼런 죽음의 칼날을 숨긴 채 잔치의 활기로 가득한 가면무도회가 시작되면서 더욱 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 상태가 중첩적으로 노래되며 긴장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의 가면무도회 공연은 2011 제 9회 대구오페라축제의 폐막공연인 만큼 국립오페라단과 공동으로 제작되어 가장 화려하고 큰 규모의 무대를 선보였다. 막이 오르면 시리도록 차가운 검은 배경에 온통 선명한 붉은 옷으로 갖춰 입은 군중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세 주인공의 비극적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총 다섯 번의 무대전환을 할 때마다 정교하고 세련된 세트가 눈길을 사로잡지만 오페라하면 연상하는 풍성한 러플 달린 복식, 육중한 장식미 따위는 없다. 2000년대 들어 트렌드가 된 오페라 연출은 ‘미니멀리즘’인데, 전 시대가 극의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다면, 미니멀리즘 연출은 세트와 도구를 최소화하여 조잡함을 없애고, 이번 공연처럼 선명한 색과 조명의 강조라든지, 독창적 무대 구도 배열을 이용해 단순한 세련됨을 추구한다. 의미심장한 효과 몇 개로 연출가가 의도하는 대상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깔끔한 형식미와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들 수 있겠다.

가면무도회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대개 그렇듯, 극과 음악의 조화가 훌륭하며 대중성 강한 통속극이다. 쉽게 빠져들 순 있지만 감동은 진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