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사회에선 암암리에 무언가를 할 ‘적당한’ 시기를 정해 놓았다. 10대엔 무엇을 20대, 30대엔 무엇을 할 적당한 시기 말이다. 일반적인 시기에 맞춰 10대를 보내고 나서 20대를 시작하는 사람의 신분은 보통 대학생이다. 이렇게 적당한 때에 맞춰 당연한 듯 대학에 입학한 후 남자에겐 1학년이나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여자에겐 20대 중반을 넘기기 전에 취직을 해 자리를 잡는 것이 적당한 경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적당한’ 시기라는 관념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약을 건다. 바로 ‘늦지 않았을까?’ 라 것이 그것이다. 나이가 들 수 록 늦었다는 생각에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만학도’도 그런 경우이다. 그런데 한 대학 캠퍼스에서 스물아홉세의 만학도를 만났다. 경력이 꽤 쌓인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탄탄한 스토리를 위한 소스를 얻기 위해’ 공부를 더 하고자 스물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08학번으로 입학한 안효진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S#1. 늦은 대학 입학 결심/ 20대의 중반에서.

11월 중순의 해질녘. 인터뷰이 안효진이 살고 있는 서울 홍대 앞의 한 고시원 4층 스터디룸. 인터뷰이 안효진과 기자가 탁자에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고 그들의 주변엔 입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몇 명 앉아있다. 안효진과 기자는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 인터뷰를 시작하려하자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기자: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시겠어요?

안효진: 저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재학 중인 안효진입니다. 지금은 휴학 하고 한겨레 영화연출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스물아홉살이구요.

기자: 늦게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안효진: 검정고시를 보고, 돈도 없고 가고 싶은 대학이 없어서 대학을 안 갔어요. 바로 미용관련 일을 시작했죠. 그러고 나니 어느새 24살이 됐고 경력을 꽤 쌓았었죠. 일이 재미있긴 했는데 어느 순간 “공부가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책이랑 영화 보는 걸 좋아했는데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영화를 만드는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O.L) “당시 제 주변(직장)엔 제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죠. 그래서 ‘아, 대학 가야겠다.’라는 결심을 했죠.”


S#2. 대학 진학의 뚜렷한 목적/ 영화를 위해.

해가 완전히 져서 실내 불이 모두 켜졌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실내에서 간혹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들고 인터뷰이의 목소리가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기자: 늦게 시작하는 게 불안하지는 않았나요?

안효진: 아무래도 불안했죠. 공식적으로 보면 백수고, 집에서도 안 좋게 보았죠. 게다가 학원을 다니지 않고 독서실을 다녔는데 그래서 인간관계가 없었어요. 때문에 사회에서 도태되는 느낌이 들었죠. 지독한 외로움이랄까? 그런데 이 시기가 오히려 저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나에 대해 돌아보면서 나한테 질문하면서 저에 대해서 잘 알게 되고 단점들을 많이 고쳤어요.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그때 제일 많이 봤고요. 모의고사 보면 성적 오르면 즐거웠구요.

기자: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는데 왜 문화인류학과로 진학하셨나요?

안효진: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에 스토리가 탄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 생각했어요. 이야기가 중요한 거라고요. 그래서 감독은 철학적 베이스와 뚜렷한 가치관이 있어야 된다 생각했죠. 그러다 우연히 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를 읽게 되었어요. 그 책을 통해 문화인류학이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온다는 학문이란 걸 알게 되었고 큰 매력을 느꼈죠. 지금도 전공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제 전공은 사람을 보고,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보는 눈을 키워줬어요.


(O. L)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에요. 나를 잘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나를 극복 할 수 있거든요. 저는 늦게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어요. 영화를 위해 이야기가 중요한 것도 늦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 같고요.”

S#3. 늦은 대학 입학/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

스터디룸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러 간 듯 빠져나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인터뷰이의 말이 빨라지고 톤이 한 층 진지해졌다. 

기자: 대학 입학 후 동기나 선배보다 많은 나이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안효진: 나이로 사람들 관계에서 상처받은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전 중학교 때 이후로 제 또래집단에 속해 있은 적이 없었어요.(안효진씨는 고등학교 자진퇴학 후 검정고시를 보았다.) 그래서 나이에 따른 고정관념이 적었죠. 대학 입학 후엔 나이와 관계없이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어요. 음... 그리고 오히려 좋은 점이 있었어요. 나이가 많아서 눈치 안보고 제 의견을 말하기 쉬웠죠(웃음). 

기자: 그전에 했던 직장생활과는 다른 대학생활을 통해 바뀐 것이 있나요?

안효진: 입학 전엔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져있어 배려심이 많기보단 직설적인 편이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을 거치고 대학생활을 하며 관계에서 필요한 배려를 배웠어요. 또 한편으론 영상인류학회라는 동아리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접했고 극영화에만 있던 관심이 다큐멘터리에도 생겼어요. 영상에 대한 꿈과 욕심은 더 커졌고요.
 



↑ 안효진씨가 한양대학교 영상인류학회 활동을 하면서 만든 작품. <Follow The Rainbow>와 <나는 대학간다, 고로 존재한다>


기자: 휴학하고 집이 아닌(본가는 청주) 홍대에 살며 영화학교를 다니는 건 어떤 이유인가요?

안효진: 대학 입학 전엔 공상적이었다면 입학 후엔 제가 생각한 것들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제게(더 나은 영상을 위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현실적으로 구별해 선택하기 시작했죠. 이야기와 함께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노력들을 했어요. 홍대에 사는 것도, 영화학교를 다니는 것도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실행했죠.


(O.L) “오히려 제가 맞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덜 불안한 것 같아요. 남들보다 늦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미 늦어버렸다 주저앉을 순 없고, 그저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S#4. 인생은 지도 없는 여행/ 모든 어려움은 영화의 밑천


안효진씨가 홍대 앞의 고시원에 살면서 만든 작품. 그녀는 고시원은 잠깐 거쳐가는 '정거장'에 비유하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특성과 엮어 영상을 풀어 나갔다.


기자: 쉽지 않은 시도를 하면서, 좌절할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럴 땐 어떻게 그걸 견뎠나요?

안효진: 물론, 좌절 할 때 있죠. 그런데 경험들도 나중에 이야기를 만드는데 좋은 기반이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기록을 했어요. 나의 행동패턴을 세세히. 그러다 보면 또 기분이 좋아져요(웃음) 인생은 어차피 여행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요.


기자: 효진씨의 차후 계획은 무엇인가요?

안효진: 극영화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일단 지금은 다큐 쪽 일을 하고 싶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에는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어요. 탄탄한 이야기를 하는 대중지향적인 감독이 되고 싶어요.


(O.L) “산다는 건 말랑말랑한 상태에서 하나, 둘 상처가 생겨 울퉁불퉁해지면 그 상처를 둥글게 다듬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만학도’ 이지만 인터뷰를 내내 그녀에게선 나이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나이가 많은 것도,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것도 그녀의 발목을 잡는 요소는 아니였다며, 오히려 그보다 제일 두려워 해왔던건 '재능없음'에 대한 것이였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대학을 들어 온 후에도 고민이 많았고 망설임도 많았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꿈꾸는 대로 될 거야'라고 되새긴다고 한다. 노트를 갖고 다니며 시간 날때마다 아이디어를 적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안효진씨를 보면서 그녀가 완성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루빨리 브라운관에서 보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