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d가 아니라 wish다. 영화 <바람>의 영어 제목 말이다. 주인공 정우(극중 짱구 역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소위 ‘일진’이 된 학생의 고교시절 성장통을 담백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를 리얼한 부산사투리와 주인공의 솔직한 내레이션으로 맛깔나게 버무린 영화 <바람>. 철없던 시절 누구나 겪는 한 순간의 바람(wind)이 아니라 주인공이 꿈꿨던 학교생활에 대한 바람(wish)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다시 돌아간다면…’ 만화 같은 학교생활


주인공의 본명은 김정국. 어릴적부터 짱구로 불렸던 그는 공부 잘하는 형과 누나 사이에서 유일하게 실업계인 상고에 진학한다. 한 반에 복학생이 한 두명씩 있고, 뚱뚱해서 짜증난다는 이유로 길 가던 학생을 마구 때리는 게 용납되는 곳. 뿐만 아니라 1학년은 버스에서 뒷문 이상 뒷자리로 가면 안 된다는 어이없는 규율도 지켜야하는 학교에서 짱구는 왠지 ‘잘나가는 애들’에 속하고 싶다. 그래서 학교 불량서클인 ‘몬스터’에 가입한다.

학창시절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학교마다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잘나가는 애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조금 덜 한 애들, 평범한 애들, 왕따 등등 피라미드 구조로 계급(?)이 나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속하면 학교를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심지어는 선생님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

학교 폭력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하거나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일진을 꿈꾸는 주인공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솔직해져보자. 우리 모두가 짱구처럼 일진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피라미드의 가장 하위계층인 ‘따’가 되고 싶지 않았음은 확신한다. 짱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권력을 가지고 폼 나는 학창시절을 보내려는 바람(wish)을 가진 것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똑똑하게도 일진 놀이를 하는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밉지 않게 만드는 두 가지 장치를 추가했다. 하나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내레이션이고 또 하나는 사실적인 묘사이다. 짱구가 같은 반 학생의 폭로로 유치장을 갔다 와서 그 친구에게 “야 어리버리, 조용히 해라.”라며 괜히 시비를 거는데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왜”라는 대답을 듣고 말문이 막힌다. 이 때, 짱구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중이다. 맞는 것 같다. 지입으로 지가 말하는데…’ 할 말이 없자 의자를 던지며 허세를 부리지만 속마음을 읽은 관객에게 짱구의 행동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습다.

뿐만 아니다. 폭력 서클의 상징인 싸움 장면은 또 어떤가. 속된 말로 ‘다이다이를 까다’라고 하는데 몬스터 멤버인 영주가 버스에서 시비가 붙은 복학생과 다이다이를 까러 뒤뜰에 나갔을 때, ‘꼰지르기(고자질) 없음’, ‘죽어도 책임 없음’같은 거창한 각서를 쓴 다음 장면은 너무 현실적이라 웃음이 나온다. 기존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각도 딱딱 맞고 합이 맞는 싸움은 온데간데없고 서로 엉켜 붙어서 때리는 건지 마는 건지 닥치는 대로 팔만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폭력 서클도 별 거 없구나.’ 싶다. 가장 폭력적인 장면을 보고도 웃음이 먼저 나오는 이유다.


바나나우유에 담긴 부자의 정(情)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방황하던 시절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 짱구 역시 아버지가 간경화에 걸린 것을 계기로 긴 방황을 끝낸다. 애초에 서두에서 자막으로 가족애를 강조한 영화라는 점을 밝히고 시작한 <바람>은 그 중에서도 ‘부자의 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는 ‘바나나우유’라는 매개체를 통해 드러난다. 

짱구가 학교폭력으로 유치장에 갇히던 날, 아버지는 면회를 와서 정작 아들의 얼굴도 보지 않고 돌아간다. 이 때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바나나우유와 빵은 면회가 끝난 뒤 경찰관이 짱구에게 건네준다. ‘너거 아버지 이거 니 먹일라고 한~참 기다리다 가셨다잉’이라는 경찰관의 말에서 우리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속내를 알게 된다. 여기서 바나나우유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병든 아버지를 목욕탕에 부축해 드린 날, 짱구는 ‘내가 등 밀어줄까?’, ‘더 필요한 거 없나?’라며 계속해서 물어보지만 아버지의 부탁은 바나나우유를 사달라는 것 하나 뿐이었다. 여기서의 바나나우유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이다. 병들고 나약해진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아들의 마음인 것이다.

이렇듯 표현에 서툰 무뚝뚝한 경상도 부자의 진심은 바나나우유 하나에 담겨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때로는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 한마디보다 마음이 담긴 물건 하나가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백분 활용한다.

폼 나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부터 아버지께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는 바람까지 짱구의 바람(wish)은 나름의 방식으로 모두 이뤄졌다. 불량서클 몬스터에 가입하며 잘 나가는 학생으로, 아버지께 말하고 싶었던 괜찮은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은 아버지의 환영을 통해 전했다. “1학년으로 다시 돌아가라면 돌아가겠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돌아가야지!”라고 대답한 짱구는 ‘내가 다시 1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이유는…’이라며 그 답을 각자에게 맡긴다. 이제 우리가 저마다의 바람(wish)을 찾아 답을 찾아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