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일’ 현수막이 내걸렸다. 평소 드문드문 발길이 오가던 문방구에 모처럼 손님이 몰렸다. “왜 이렇게 싸요?” 캐릭터 필통을 골라든 어린 손님이 묻자, 여사장님은 이제 문방구를 정리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A문구점은 부산시 동래구 학원 밀집 지역에서 10년 넘게 자리를 지켰다. 학용품은 물론이고 완구, 액세서리, 선물, 디자인 소품을 함께 팔아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문방구를 찾는 손님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목이 좋은 자리라 자릿세는 해마다 오르는데 매출은 줄어드니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생 수도 줄였다. 하지만 여전히 가계는 낙관적이지 않았고 사장님은 결국 문을 닫기로 결심 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 되겠네요. 지금은 세일한다고 손님이 이 정도지……” 남은 물건을 30~50% 세일가로 정리하느라고 사장님은 오랜만에 바빴다.

사라지는 문방구들 ⓒ하기자


문방구가 사라진다. 폐점으로 남은 물건을 할인가로 정리하는 문구점은 비슷한 시기 다른 동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역사가 오래된 문구점이나, 최근 새롭게 생긴 문구점이나 여건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문을 닫는 문방구는 얼마나 될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9년 2만 6986곳이었던 문구용품 소매점은 2009년 1만 7893곳으로 10년 만에 34%가 줄어들었다. 그 뒤로도 문방구 점포수는 더욱 줄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문방구가 사라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교육청과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학습준비물 지원 제도(준비물 없는 학교)로 생긴 변화가 크다. 초등학교의 경우 학습준비물 지원 센터를 운영하며 물감, 풀, 원고지, 색종이 등 주요 학용품을 갖춰놓고 있다. 등교시간에 준비물을 사려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학교 앞 문구점 풍경은 그야말로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동네 문방구 대신 대형 문구점(체인점)이나 온라인 쇼핑몰을 찾는 것도 영세 문구점을 어렵게 만든다. 또한, 물건 종류가 다양하고 저렴한 값으로 대량 판매를 하는 대형, 온라인 문구점과의 경쟁에서 동네 문구점이 이겨낼 재량이 없다. 그리고 요즘은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에도 문구류, 사무용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문방구의 존재감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형슈퍼마켓(SSM) 내 문구류 코너 ⓒ하기자


동네 문구점의 폐점 소식을 들은 박지영(25·여)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다니던 곳인데 아쉽다. 문방구는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주부 강경숙(54·여)씨도 “우표를 사거나 복사한다고 문방구를 갔는데, 이제 급하게 문구류가 필요해도 가까이서 살 곳이 없다”고 걱정했다.

주택가 골목골목마다 자리 잡은 문방구는 온갖 필요하고 재미있는 물건이 가득한 학생들의 백화점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문구점에서 친구들과 모이고, 이야기도 생겨나며, 유행의 시작지였다. <Mr.K> 등 십대들이 주로 찾는 잡지, 연예인 사진이나 스티커, 브로마이드가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되는데 문구점이 있었다. 딱지, 요요, 야구선수카드, 오락기 등 시절마다 유행하는 장난감을 파악할 수 있는 곳도 문방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방구는 물건 가지 수가 다양해지고 가게 인테리어도 깔끔해져 문방구의 간판은 ‘팬시점’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아지트’라는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추억의 장소와도 같은 문구점이 점점 더 사라진다. 우리 동네에 남은 마지막 문구점까지 없어진다면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장소가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아지트, 문방구 ⓒ하기자


문구점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설까. 지난 3월 문구점이 사라진 터에는 본래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복층 건물이 생기고 있었다. 문구점 사장님과 주변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화장품 가게와 핸드폰 판매점 등이 입점할 예정이라고 한다. 두 곳 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 체인점이다. 고유의 상호를 걸고 동네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문방구를 대신하는 익숙한 가게와 간판들. 동네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달라진 동네들은 서로 닮아간다. 비슷한 거리에, 비슷한 가게들만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