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재밌어봐야 얼마나 되겠어 싶었다. 그래봐야 케이블 드라마인데? 얼굴도 잘 안 알려진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타임슬립이라고? 그럼 SBS에서 한다는 <옥탑방 왕세자> 아류작 아냐? 그래서 넘어갔다. 어차피 16부나 되는 ‘지루한’ 드라마라는 장르, 진득하게 못 보는 성격이니까. 게다가 퓨전이든 전통이든 옛날 옷 나오는 사극을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호평이 이어졌다. 연기, 연출, 영상미, 소품, 대본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들 난리가 났다. 거기에 넘어가 출발하고 나니 어느새 16화까지 정주행 완료, 인현왕후의 남자가 없는 수요일, 목요일이 어쩐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잊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인현왕후의 남자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 리뷰를 남긴다.

조선 사람의 재발견, 이렇게 매력적이었어?

그동안 알던 조선 사람들, 그 중에서도 주인공들은 대단히 지루했다. 역사적 위인들은 언제나 도덕적인 선을 지켰으며, 사명감을 위해서만 사는 것 같아 위엄이 느껴지긴 했어도 인간미는 좀 부족했다. 미각을 잃었다며 하염없이 울던 장금이나 약초 캐는 일에만 관심이 있던 이제마,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수많은 왕들. 조선인들은 뭐 이렇게 하나 같이 캔디 과로만 그려졌는지. 극의 재미를 위해 감초 역할들이나 좀 욕망에 사로잡힐 줄도 알고, 해학적으로 살 줄 알지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심각한 인간들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TV도 없고 놀 거리도 별 거 없던 옛날 사람들은 다 재미없게 살았겠지 싶기도 했다.

‘인남’의 주인공, 김붕도(지현우)는 좀 다르다. “일부다처에 기생들도 있었고, 지금보다 여자를 잘 알면 잘 알지 몰랐을 리가 없잖아?” 극 중 최희진(유인나)이 김붕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 대사는 핵심을 꿰뚫고 통념을 뒤집는다. 최희진의 핸드폰에 ‘선수’라고 저장될 정도로 김붕도는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도 로맨틱하게 여자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최희진이 키스를 작별 인사법이라고 일부러 잘못 알려줄 때 김붕도는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속는 척하고, 펜션에서 최희진을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이 긴 밤을 어찌 나 혼자 보내란 말이냐’고 읊조린다. 또한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의외의 장난기도 김붕도를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 tvN 인현왕후의 남자



로맨스, 코미디, 액션, 정통사극을 넘나드는 진정한 퓨전극

한 회에 45분짜리 짧디 짧은 드라마의 절반은 조선 숙종 시대 한양, 다른 절반은 2012년 서울의 시공간으로 채워진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시공의 간극만큼이나 명확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차이에서 ‘인남’은 종합선물세트가 된다. 로맨스, 코미디, 액션, 정통사극에 이르기까지 융합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장르들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채로 시청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도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지점에서 말이다.

과거 숙종 시대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장희빈의 이야기의 액션 활극 버전쯤으로 보면 되겠다. 서인과 남인의 양보 없는 싸움은 ‘인남’ 속에서 유혈이 낭자하는 싸움으로 나타난다. 김붕도의 몸통을 관통하는 화살, 칼 한 자루씩만 든 자객들의 혈투, 그리고 그 끝에 베어지는 적의 목. 와이어 액션은 물론이요, 화려한 기술들을 총동원해 만들어낸 액션은 어느 영화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케이블이라는 특성이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케 하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활이 날아가는 장면 후에 배우의 고통스러운 얼굴 클로즈업으로 점프할 필요 없이, 활이 몸을 관통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2012년 서울에서는 드라마 <신장희빈>을 찍는 최희진을 중심으로 연예계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년 우리가 <최고의 사랑>에서 보았던 연예계 이야기를 떠오를 만큼, 온갖 루머와 연예인 간의 알력 싸움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톱 남자배우로 그려지는 한동민(김진우), 희진의 절친이자 매니저로 등장하는 조수경(가득희) 등은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하는 코미디라는 중요한 축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인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맨스야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하늘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연인의 사랑이기 때문에, 기약 없는 이별이 반복되는 사랑이기 때문에 짧은 만남의 순간들은 더욱 애틋하다. ‘폭풍눈물’로 화제가 된 유인나의 눈물 연기는 보는 사람의 감정선 깊숙한 곳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 tvN 인현왕후의 남자



역사를 뒤바꾸는 김붕도, 예측불허의 서스펜스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쓰여진 부적을 품은 김붕도는 자신의 의지대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의 타임슬립 그리고 부적은 단순히 김붕도라는 인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김붕도 개인에게 일어난 일은 역사를 바꾼다. 다시 말해 그는 숙종의 시대와 2012년을 이어서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현대로 처음 넘어와 도서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발견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좋은 세상’이 온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하는 김붕도. 그러나 그가 실록을 본 상태로 과거로 돌아간 사건은 나비효과처럼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며 역사를 바꿔버린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부적도 ‘인남’을 흥미롭게 만드는 데 한 몫 단단히 한다. 부적이 찢어졌을 때 2012년에 벌어졌던 김붕도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부적을 처음 받은 기생 윤월(진예솔)이 숨을 다했을 때 부적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2012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김붕도는 현재로 돌아가는 것을 체념하고 부적을 태워 기억을 없애버리기로 한다.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극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시간의 벽, 공간의 벽, 그리고 부적의 힘 앞에서 ‘인남’은 그 끝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치밀하게 숨겨낸다.

비슷한 드라마들이 모두 그랬듯이, 결국엔 김붕도와 최희진이 행복하게 지내는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1주일이 멀다 하고 튀어나오는 두 사람의 키스신은 그 결말을 확신하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회 마지막 10분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까지도,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사가 두 사람의 사랑을 결국 갈라놓게 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사랑이 역사, 시간, 공간이라는 모든 벽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보통 방송 마지막 주쯤 되면 결말이 눈앞에 그려지고 힘을 잃어버리는 다른 드라마들을 압도하는 ‘인남’의 뒷심이었다.

아,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직접 정주행하며 확인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