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작 전의 알 수 없는 긴장은 러닝타임 내내 타는 듯한 갈증으로 이어졌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가슴이 먹먹하더니,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부터는 약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온몸이 오래도록 뻐근했던 것은 늦은 현장 예매로 맨 앞줄에 앉았기 때문이 아닐 게다. 이 영화에 대해 몸은 이렇게 불편하게 반응했다.


<두 개의 문>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1년, 뉴타운이라는 정부의 기치 하에 강행된 재개발 현장에서의 참사 기록을 담았다. 용산 ‘참사’라 불리는 이유는 냉기가 세상을 얼려버릴 것 같던 2009년 1월 20일 새벽, 철거민 다섯 명과 이들을 막기 위해 투입된 경찰특공대 중 한 명이 갑자기 발생한 화재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왜’를 파고든다. 왜 불이 났는가. 그 전에 왜 농성을 시작한지 고작 25시간 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는가. 재판에 나온 특공대원들의 증언은 왜 교육받은 듯 천편일률적이며, 경찰 채증 영상은 왜 화재 발생 부분만 삭제되었는가. 왜 수사기록의 3000쪽은 사라졌는가. 왜 재판부는 모든 책임을 철거민에게 물었고 중형을 선고하였는가. 물론 이것은 모두 엄연한 사실에 대한 물음들이다.

아니다. 영화는 ‘왜’를 파고든다기보다는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라는 프레임에 충실하게 목격자들(기자들)과 진상조사단 및 당시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 등의 인터뷰를 듣게 한다. 또한 현장의 활동가들이 담아낸 영상과 경찰이 채증한 실재를 바탕으로 구성되며, 그 영상 기록들을 절묘하게 재배치하여 일종의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서스펜스를 놓치지 않는다. "다른 걸 차치해두고서라도 참 잘 만든 영화“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바로 훌륭한 만듦새 덕분이다.


  
뿌옇고 어둑한 건물, 검은 파카를 입은 농성 시민들과 허연 경찰복 차림의 특공대원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바닥에 꽂히는 화염병들, “농성을 중단하고 밑으로 내려오십시오.”라는 경고 방송 목소리,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불안한 눈빛, “시간이 없다. 컨테이너 설치는 다 끝났나? 크랭크에 달고 대원들 넣어서 얼른 올려 보내.”라는 버저 저편 경찰 간부 목소리. 그것들이 화면에 중첩되며 긴장감을 일으킨다. 긴장감은 두려움으로 전이되며 두려움은 숨죽인 공포로 번져간다. 이렇게 담담하고도 집요한 서스펜스는 101분 내내 지속되어 ‘영화가 왜 이리 일찍 끝났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영화가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참사 당일 새벽, 망루에 투입된 특공대원들은 위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되었다. 농성이 시작된 지 고작 하루가 넘은 때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떠밀리듯 들이닥친 대원들은 총체적 혼란에 빠졌다. 이들은 농성 건물인 남일당이 어떤 구조를 지녔는지도 모르고,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는 망루로 통하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망루 반대편 건물로 통하는 문이다. 누구도 어느 문이 망루로 들어가는 문인지 알지 못해 갈팡질팡한다. 명령만 하달 받고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특공대원들. 그렇다. 영화는 그들 역시 피해자로 그려낸다.

“다 죽어! 다 죽으라고!” 채증 영상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아비규환의 망루에서 극한의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특공대원들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네, 그 소리, 기억....납니다. 저희들더러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뭐 철거민들 향한 것 같기도 했고, 그 때는 그냥 너무 무서웠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특공대원들이 느꼈을 공포와, 철거민들이 느꼈을 공포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투입된, 그리하여 철거민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경찰들이 역설적으로 상황적 절망에 함께 들어있음을 관객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다.

<두 개의 문>은 선동하지 않는다. 철거민 유가족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재개발이나 투쟁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왜 경찰과 시민이 서로에게 적개심을 품어야 했고, 무엇을 위해 서로에게 칼을 들어야 했는가. 기존의 시민 대 공권력이라는 대립구도에서 벗어나있는 의문이기에 충격적인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관객은 스크린 속에서 절망을 재차 확인하며 공감한다. 이 공감은 열렬히 타오르고 있다. 지난 6일 누적 관객수 2만 4000명을 넘겼으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상업영화 틈에서 박스오피스 9위에 올라 있다. 개봉 당시 16개였던 스크린 수는 5일부터 35개로 확대되었다. 상영관이 없는 지역에서 “극장을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관객이 직접 대관을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었으며, 단체 관람도 다수 있어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데 얼룩진 비극을 보셨습니까? 불의의 문은 닫고, 정의의 문은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함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두개의 문>은 그을린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의 방향키를 끼익, 돌리려 하고 있다.  경찰특공대의 한 팀장이 쓴 진술서 마지막에 있던 내용을 내레이션으로 듣는 순간, 기어이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말았다. “우리 동료도, 농성자들도, 모두 사랑하는 국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