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은 개천절이었다. 집에 태극기를 달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자취방, 기숙사에 사는 몇몇 친구들에게 거기서도 태극기를 달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하나같이 못 달아였다. 국기게양대는 물론, 국기를 달 곳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방도 좁고 창문도 좁은데 국기게양대는 무슨…….” 이라 말하기도 했다. 사실 국기게양대가 굳이 없어도, 조립식 국기꽂이를 사면 얼마든지 국기를 게양할 수 있긴 하다. 3,000~5,000원으로 가격도 저렴하다. 그러나 국기꽂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기꽂이의 한 종류인 쌍국기꽂이. 벽면, 가로등 등에 고정해 사용할 수 있다.



국경일이면 꼭 나오는 기사가 있다. 태극기를 게양한 모습을 담은 기사, 그리고 태극기 실종이라 하여 국경일임에도 태극기를 달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기사이다. 이들 기사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길거리 및 관공서에 달린 태극기가 펄럭이는 사진을 보여주고, 후자의 경우에는 주로 아파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후자의 기사에 딸린 사진을 보면 태극기를 게양한 집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그러면서 기사를 통해 사람들의 국경일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졌다는 둥, 태극기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는 둥 걱정 어린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전하는 언론이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다. 태극기를 달 수 있는데도 안 다는 가구가 있는 반면, 자취방이나 기숙사 등에 사는 사람들처럼 태극기를 달고 싶지만 달 수 없는 가구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 근래 태극기를 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건 사실이며, 이를 부각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파트 사진만 보여주다 보니, 정작 태극기를 달고 싶지만 달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외면당하고 만다.


 

개천절 한 아파트의 모습. 태극기를 단 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 대학 기숙사의 모습. 이곳 기숙사에는 국기 게양대가 달려 있지 않다.



물론 태극기를 반드시 바깥에 게양할 필요는 없다. 행정안전부에 있는 태극기 관련 페이지에는 태극기를 실내에 게양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문제는 자취생, 기숙사생들 상당수가 태극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본래 집에는 있지만 자취방이나 기숙사에는 없는 경우였다. 태극기를 달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태극기를 살 수 있는 곳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태극기는 문구점이나 마트 등에서 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몇몇 대학교 근처의 편의점과 문구점 등을 조사한 결과 태극기를 파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파는 곳이 있고 팔지 않는 곳이 있는 것이다. 사실 태극기를 파는 곳은 문구점 외에도 많다. 각급 지자체 민원실(··구청 및 읍··동 주민센터 등),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 인터넷 쇼핑몰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사람들은 태극기를 구하는 데 애를 먹는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주민들의 태극기 게양을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위치한 감천 1동은 101일부터 9일까지 태극기 게양의 날을 운영하고 있다. 관련 시민단체들은 태극기 달기 홍보물 배부와 가두 캠페인을 펼쳤고, 주민들도 아파트 부녀회 등을 통해 태극기 게양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감천 1동은 지난 광복절에는 옥천로와 감천로 일부를 태극기 시범거리로 지정하기도 했으며, 주민자치위원회 등에서 기금을 마련해 태극기와 국기꽂이를 100개씩 구입해 나눠 주기도 했다. 충주시 지현동 역시 올 9일까지를 태극기 달기 운동 집중 추진기간으로 정하고, 광범위한 주민 동참을 위해 핸드폰 문자메시지, 홍보물, 안내방송 등을 통한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태극기를 집중 게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마음만 먹으면 태극기를 달 수 있는 시민들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태극기 게양 및 구입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 혹은 정보가 필요한 이들에겐, 여전히 태극기 게양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국기는 그 나라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 목표 등을 담은 중요한 기호. 국경일이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라면, 국기를 다는 행위 자체로도 국가를 생각하고 기념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론에서 국경일에조차 잘 보이지 않는 태극기의 모습에 개탄하는 건 좋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러한 개탄마저도 정형화되어 버렸다. 국기를 달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만, 국기를 달 수 없거나 달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원룸, 고시원이 크게 늘어나는 등 주거 형태가 예전과 많이 달라지고 1인 가구,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난 만큼, 더 이상 전과 같은 눈으로 태극기 게양에 관련한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태극기를 달지 않는 아파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어디서 태극기와 국기꽂이를 살 수 있는지, 왜 이들이 태극기를 달지 못하는지, 등에 대해 알리는 게 오히려 태극기 게양을 확산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