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소비자 외면하고 제3세계 주목하는, 현대 자본주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이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를 통해서 유한킴벌리는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착한 기업’의 대명사가 됐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사회공헌활동은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작용하고 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Sustainability(지속가능성), Responsibility(책임성) 등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업들의 홈페이지의 주요 메뉴를 차지했다. 대선과 총선이 맞물린 2012년 한국 정치권의 최대 이슈도 다름 아닌 대기업의 사회 책임성을 논하는 경제민주화다. 
사회의 토양을 먹고 벌어들인 이윤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데도 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추세에서 노동자와 소비자는 그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기업의 이윤에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자의 노동과 소비자의 가격 지불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사회 공헌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 CSR은 단순한 사회 공헌 활동, 자선 활동의 의미로 축소되어버렸고, 노동자와 소비자들은 기업이 책임질 대상이 되기는 커녕 기업의 CSR에 이용되기나 하는 것이 현실이다.


스타벅스의 사회공헌 내역 ⓒ 스타벅스 홈페이지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 스타벅스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기업 특성에 맞게 기본적으로 커피 원산지 보호, 커피 농가 지원 활동 등의 윤리적 원두 구매를 실천하고 있으며, 친환경 매장 설계, 일회용 컵 없는 매장 등 환경 보호 활동도 진행 중이다. 지역사회 결손 가정 어린이 지원, 문화재 지키기 캠페인, 푸드 뱅크 기부 캠페인 등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 활동도 매우 풍부하다. 이 같은 방식으로 스타벅스는 사회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빚지지도 않은 환경 보호나 결손 가정, 문화재 문제에는 앞장서면서도 스타벅스는 정작 노동자와 소비자에게는 인색하다.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의 시급은 2012년 기준 4700원으로 최저시급 4560원보다 단 140원 많은 수준이다. 대졸 매장직 초봉 역시 2000만원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스타벅스는 CSR 수행 과정에서 직원 내부에서 자발적 급여 공제 캠페인을 벌이고 자원봉사에 직원들을 동원하고 있다. 2012년 2/4분기 스타벅스 직원들의 자원봉사 활동시간은 총 7710시간, 기부액은 2000만원을 상회한다. 소비자들 역시 계속해서 오르는 커피 가격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올 5월 스타벅스코리아는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등 32종의 가격을 300원씩 인상했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에 드러난 스타벅스의 2011년 매출액은 2981억, 영업이익은 224억이었다.

ⓒ 유니클로

SPA브랜드 유니클로의 사례도 비슷하다. 유니클로는 UNHCR(유엔난민기구)와 함께 대대적인 의류 리사이클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300만 벌의 옷을 세계 난민 캠프에 전달하기 위해, 가정에서 입지 않는 유니클로 의류를 세탁 후에 매장으로 들고 와 달라는 캠페인이다. 2006년 이후 세계 22개국에 420만 벌의 옷을 전달했다. 1점포 당 1명의 장애인 고용을 추진하는 것도 유니클로 CSR의 일환이다. 그러나 유니클로 역시 스타벅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소비자들까지도 사회적 책임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유니클로의 아르바이트 시급은 5500원이며 정직원들의 초봉 역시 2000만원에 그친다. 고객이 들어오지 않아도 15초에 한 번은 인사말을 외쳐야 하는 식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비하면 매우 적은 임금이다.

유니클로의 경우, 리사이클 운동을 진행하는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 유니클로의 리사이클 캠페인은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옷 수거’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유니클로 매장의 곳곳, 심지어는 계산대 바로 옆에는 리사이클 캠페인에 대한 공지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다. ‘당신의 유니클로가 필요합니다’, ‘히트텍은 없으십니까?’와 같은 말들로 소비자들의 양심을 건드리면서 그들이 ‘착한 윤리적 소비자’로 거듭날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착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 유니클로 옷을 되가져왔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전혀 없다. 헌책방에서처럼 수거된 옷에 대한 가격이 지급되는 것도, 포인트가 적립되는 것도 아니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유니클로가 가격을 올리면 올린 가격에 맞춰 돈을 준비해야 되는 ‘을’일 뿐이다.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주어져야 할 초과분의 이윤이 제3세계 난민이나 불우이웃과 같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왜일까? 사회의 강력한 ‘책임’ 요구에 직면한 기업들이 노동 조건이나 가격의 개선 없이 ‘사회 공헌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얻으려는 책략 아닐까. 실제로 이러한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근로자, 노동자들은 기업 사회 공헌의 혜택을 받지는 못하면서도, 기업의 사회 공헌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동원되어야 한다. 봉사와 모금 캠페인의 대상이 된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이나, 옷 수거를 ‘반강요’받은 유니클로 고객들처럼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제3세계나 불우이웃들 역시 사회공헌활동과 함께 사진 속에 영원히 새겨져 기업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렇게 묻고 싶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CSR인가.

일찍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1872~1950)가 기업의 사회 책임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서유럽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국가사회주의,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논리다. 이는 상호성(호혜성, Reciprocity)에 관한 그의 저서 <증여론>에 나타난다. 모스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이익을 본 자들은 단순히 임금을 지불하는 것만으로는 노동자에게 빚을 갚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노동자의 실업·질병·노령화 및 사망에 대한 일정한 생활보장이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스의 기준에서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서 진행되고 있는 CSR은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