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머리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동네도서관 지하 매점에서 마주쳤던 일이야. 시험 기간 혼자 도서관에 가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는데 네가 친구들과 같이 와있었지. 당시 16살, 난 사춘기 청소년들이 그렇듯 말 없고 숫기 없는 중학생에 불과했고 여자친구들에겐 먼저 말을 걸지 못했어. 그때 네가 먼저 말을 걸어준 거야. 그게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연경, 너야.

그때 넌 나와 키가 비슷했어. 다른 배구부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컸지만. 그래서인지 주니어대표로 다른 친구가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도 넌 남아 있었지. 사실 난 키가 작았던 네가 배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었어. 수개월의 시간이 지나 중학교를 졸업했고 너는 나와 다른 고등학교(한일전산여고)로 진학해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 

그 후 너를 본 건 TV 스포츠뉴스에서야. 여자프로배구 대형 신인선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데뷔해 당시 소속팀인 흥국생명을 1위로 이끌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을 때지. 자막으로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못 알아봤을 정도로 키가 자라 연신 강스파이크를 상대코트에 꽂아대더라. 호리호리한 몸에 어떻게 그런 탄력을 갖고 그렇게 화려한 플레이가 가능한지 궁금할 정도였어. 허스키한 목소리만 그대로더라.

런던올림픽 당시 김연경 선수

 
그 해 팀을 통합우승으로 이끌고 챔피언결정전 MVP, 정규리그 MVP, 신인왕 수상에 득점왕을 비롯한 여러 개의 타이틀을 휩쓸었던 너는 어느덧 세계 최고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수준에 올랐더라. ‘여자배구계의 메시’라고 할 정도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지 않을까? 지난 런던올림픽에선 부상을 안고도 한국을 4위로 이끌었지. 메달을 따지 못한 팀에서 MVP에 선정됐을 정도면 네 활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도 짐작할 수 있겠지. 이어 터키 페네르바체와 2년 10억원에 계약해 네 배구인생에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 했어.

그런 네가 요즘 힘들어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어. 소속팀 흥국생명의 부당한 요구 때문에. 흥국생명은 네가 한국에서 4년만 뛰고 임대로 해외에서 3년을 뛰어 여자배구 FA규정인 6년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네가 임대됐을 때 연봉의 20%를 갈취하는 깡패짓을 하고서도 말이지. 그리고 선수로서 아무런 권리를 지니지 못하는 ‘미아’ 신세로 전락시키는 임의탈퇴로까지 공시했었지.

대한배구협회(KVA)는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 너를 돕는 척하다 뒤통수를 때렸어. 국내 문제를 국제배구연맹(FIVB)에게 위탁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꼼수를 부렸고, FIVB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합의서를 FIVB에 보내며 사실상 흥국생명의 손을 들어줬지. 공개되지 말아야 했을 합의서에 따라 너는 로컬룰을 적용받게 됐고 흥국생명 소속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어. KVA의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면 FIVB는 네가 FA라고 규정했을 거야.

국제이적동의서(ITC)를 받지 못해 클럽 챔피언쉽에서 뛸 수 없다며? ‘진짜’ 소속팀 선수들과 손발을 맞추고 경기에서 활약하고 있어야 할 네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안타깝다. 네 트위터에서, 너를 다루는 기사에서, 네 아픔과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더라. 현역 은퇴도 고려하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왔어. 이대로라면 너는 흥국생명 소속으로 페네르바체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임대선수 신분이 되거나, 현역 은퇴를 하거나, 귀화를 하거나 어떻게든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해.

 

ⓒ 김연경 트위터


네가 선택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어. 이번 사태는 너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전반에 뿌리깊이 자리 잡은 문제에서 파생됐다는 거야. 한국 대부분의 프로스포츠 규정은 선수보다 구단에게 유리하게 돼있고 구단과 선수간의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어. 이대호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7관왕이었지만 연봉 협상에서 한국프로야구협회는 구단의 손을 들어줬지. 남자프로농구 FA규정은 연봉 최고액이 정해져있고 선수가 마음대로 팀을 정할 수 없게 돼있어. 프로스포츠가 아니라도 형편은 비슷해.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는 쇼트트랙 계 파벌싸움의 피해자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고 러시아로 귀화하고 말았어.

에이전트를 둘 수 없다는 규정도 마찬가지지. 경기에 집중해야 할 선수가 시즌 내내 기록을 수집할 여유가 어디에 있겠어? 선수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몸값을 위한 에이전트가 없다는 건 연봉 테이블에서 그만큼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거야. 구단은 직원을 통해 모은 데이터를 갖고 있으면서 왜 선수는 대리인을 둬서는 안 된다는 걸까? 다 자신이 뛰고 싶은 구단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게 선수의 기본적인 권린데.

사실 문제는 네가 로컬룰을 따르느냐, 마냐가 아니야. 그 룰이 옳으냐, 그르냐지. 네 선택은 여기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거야.

동료 한송이 선수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네”라고 했더라. 그랬지. 재활 직후에도, 부상을 당했어도 국가대표로 있었어.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네가 터키로 귀화해 이름을 바꾸고 터키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빅토르 안 선수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너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고 한국 선수로 많은 것들을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 자유니까.

나는, 아니 대다수 국민들은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너를 응원할거야. 지지마라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