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 아프리카 지역과, 국제구호 활동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봤을 일입니다. 아프리카의 빈곤국이나 개발도상국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줄 수 있을뿐더러, 봉사자 본인에게도 많은 경험과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면 매력을 느낄 법 합니다. 또한 한비야씨나 김혜자씨와 같이 아프리카 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의 책과 영상이 감동을 주면서, 젊은이들을 아프리카로 이끌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인지, 국가기관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국제구호사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봉사를 위해 아프리카 지역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100인 인터뷰는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온 20대 한 분을 모셨습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브릿지 사업’ 자원활동가로 르완다에서 2년을 생활하고 돌아온 임정아 (숭실대학교 평생교육학과 4)씨입니다. 그런데 정아씨는 꿈에 부풀어서 르완다로 갔던 2년 전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순진하게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론 힘들다.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말은 책에서 본 것이나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와, 막상 접한 현실은 다르다는 이야기겠죠.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이라면 땅이 말라서 나무 한 그루 없는 오지에 가서,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에게 물자를 나눠주는 것을 상상하지만, 실제 르완다에서 정아씨가 했던 일은 그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르완다는 발전하고 있는 나라,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여성들이 생리대를 하루에 하나밖에 못 쓰는 처지...면 생리대 사업을 추진하게 돼
시행착오도 겪었으나, 면 생리대를 통한 수익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어




 

Q. 정아씨가 활동한 유네스코의 ‘브릿지 사업’은 아프리카 지역의 풀뿌리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돕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지원하시게 된거죠?

대학교 들어가서부터 자원봉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굳이 국내에서만 활동해야 하나 싶어서,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됐죠. 당시에는 해외생활이나 해외봉사에 대한 동경도 클 때였죠. 그래서 졸업 하기 전에, 아무래도 전공이 교육 분야다 보니까, 교육 관련한 국제활동이 없나 찾아봤어요. 때마침 유네스코에서 교육봉사를 모집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을 하게 된 거죠.
 
 

Q. 해외 봉사 가기 전에, 한국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청소년수련관 등에서 ‘방과후 교실’ 교사를 한다든가, 학교 근처의 저소득층 가정 방문하는 일등을 꾸준히 꾸준히 했어요. 또 해외 봉사도 학교에서 단기로 보내는 건 갔다 온 적이 있어요. 활동을 계속 하다보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했죠.
 
 

Q. 혹시 무섭지는 않았나요? 낯선 나라에서 살아서 생활이 불편한 것은 그렇다쳐도, 정아씨가 가는 곳이 치안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잖아요.

그 때는 열의에 차있어서 보내만 준다면 열심히 할 것 같았어요. 제가 사실 그 당시에는 치안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갔거든요. 다행히 르완다는 군부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부가 들어서서 그런지, 안전한 편이었어요. 외국인이니까 눈에 띄니까 표적이 될 수 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한국만큼 치안이 괜찮은 것 같았어요.


Q. 르완다는 본인이 선택해서 가신 건가요?

여섯개 국가 (남아공, 짐바브웨,잠비아, 내소토, 말라위, 르완다) 중에, 파견이 된 거예요.
 
 

Q.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있었나요?

르완다에는 세 명이 파견되는데 완전 따로 살아요. 지역도 멀기 때문에 같이 일할 수 없고, 혼자 일해야 해요.
 
 

Q. 르완다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지네요. 적응하긴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르완다 남부 무항가 지역에서 있었어요. 우리나라와 다르긴 한데, 생각보다 삶의 방식은 많이 다르지 않았어요. 날씨가 다르고, 사람들이 주로 농사를 짓는 게 다르긴 하는데, 우리나라도 예전엔 농사 많이 지었잖아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원시문화'가 많이 남아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나라에 전통문화가 남아있는 수준, 딱 그 정도예요. 물론 미신이나 주술사도 있는데 공공연한 장소에서 이야기 하진 않고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많이 믿으니까요.

아직 텔레비전은 많이 없어요. 전기보급율이 떨어지니까 텔레비전을 보기 보다는 라디오를 많이 듣죠. 그리고 국가가 주도해서 도로 정비도 하고, 초가집도 뜯고 있어요. 우리나라 60~70년대가 왠지 이랬을 것 같아요.
 

Q. 일종의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있네요.

실제로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모델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이 새마을 운동 본부가 르완다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유엔의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농촌 개발 프로젝트)에서도 새마을 운동을 비중 있게 다뤄요. ‘우무간다’ 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주민들이 참여해야하는 공동노동 같은 것도 있어요.


Q. 르완다가 이제 막 도약하려는 국가인 만큼, 정아씨가 할 일도 꽤 많았을 것 같은데요.

큰 사업을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사는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하고자 하는 게 있으면 지켜보고 있다가 조언을 주거나, 직접 도와주기도 했어요. 주로 기존에 있던 활동을 지원하는 식이었는데요. 제가 활동이 다 끝나고 돌아간 후를 생각해서에요. 마냥 일을 제가 주도하다보면 제가 돌아간 이후에는 활동이 유지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기존에 있던 활동이나 사업에 지원을 해서, 그것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죠. 물론 상황에 따라 제가 주도하는 부분도 있었지만요.
 


Q.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일단 초기에는 사람들과 친해져야 하거든요. 그 적응 기간이 조금 걸렸어요. 적응이 된 다음에는 성인 문해(문맹을 위한)교실 지원 사업이나, '아프리카의 날 행사'등을  추진했고, 가장 열심히 했던 건 ‘면 생리대 사업’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1년간 학교 상담소에서 근로학생으로 일했거든요. 당시 학교 상담소에서는 면 생리대에 대한 교육을 했었고, 저도 거기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많이 배워놓은 상태였거든요.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관심사와 지식을 바탕으로 일단 시작을 해본거죠.

Q. 르완다에 생리대가 많이 부족한가요?

여성 보건이 아직 잘 되어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보건 교육은 시키지만 현실적 여건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죠. 공장에서 나온 1회용 생리대가 있어도,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하고 현금은 없는 편이거든요. 현금으로 사야 하는 1회용 생리대를 못 사서, 하루에 한 개 쓰고 그래요. 위생에 당연히 안 좋을 수밖에요. 또 환경문제도 생각을 했어요. 여기는 필요할 때마다 화장실이 될 만한 땅을 파서 쓰고, 한 곳이 꽉 차면 그냥 다시 흙으로 메꾸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생리대가 같이 땅에 묻혀지면, 생리대는 썩지도 않으니 토양이 오염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물은 있으니까, 물을 가지고 빨아서 쓸 수 있는 면 생리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 거죠. 처음에는 재료비가 들겠지만, 일정수량만 가지고 있으면 바꿔가면서 쓸 수 있고 공장에서 만든 생리대를 사는 것보다 돈을 더 아낄 수 있으니까요. 또 이것을 많이 생산해 수익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Q. 쉬운 일은 아니었겠어요. 얼마 정도 지나니까 사람들이 면 생리대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던가요?

사실 실패도 많이 했어요. 면 생리대 사업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 번에 걸쳐서 했는데, 처음에는 취약계층 여성들 대상으로, 다음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지막으론 지방정부의 협조가 따르는 수익사업으로 진행이 되었어요.

처음부터 저는 이걸 ‘수익 사업’으로 만들려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역 목사님에게 요청해서 40명 정도의 취약계층 여성 (싱글맘, 과부 등)을 모아서 가르쳤어요.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참여하시고, 곧잘 만드시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자립의지는 없으셨어요. 제가 재료비를 지원했거든요. 그런데 처음 줬던 재료가 떨어졌으니, 재료를 더 달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수익사업을 원했던 건데...소통이 안 됐던 거죠. 그래서 그 이후에는 교육 위주로 가보자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엔 지역 교장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가서 교육을 하게 되었고, 2주 동안 4번, 180명에서 20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면 생리대를 만드는 법과, 그 필요성에 대해 가르쳤어요.



 

Q. 학생들은 아무래도 면 생리대 만드는 법이나, 필요성에 대해 교육하면 빨리 받아들이죠?

금방 배우는 면이 있죠. 그리고 제가 방법을 바꿨어요. 제가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면, 그 중에 빨리 습득하는 애들을 보조교사로 쓰면서, 세부적인 부분은 그들이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했어요. 그리고 애들을 가르칠 때는 수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어요. 일단 계속 면 생리대를 썼으면 해서, 생리대 패턴도 나눠줬어요.

몇 달후에 다시 애들을 만났는데, 애들이 면 생리대를 잘 쓰고 있었어요. 저한테 배웠던 애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애들이나, 친척들에게도 면 생리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봤고요. 학교 선생님들도 내년에도 다시  면 생리대 교육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뿌듯했죠.

 

Q. 학교에서 교육을 실시한 이후에는, 지방 정부와 같이 수익사업을 시도했다고 했잖아요. 지역에서도 면 생리대 사업을 지원하기로 한 건가요?

제가 사는 곳의 지역장(구청장) 으로 발령을 받은 공무원이, 브릿지 사업을 같이 하는 동료활동가가 있던 지역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그 분은 동료활동가랑 친했기 때문에, 저에게도 호의적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죠. 그 분은 과부와 같은 취약계층, 저소득층을 상대로 수익사업을 벌이면 좋겠다고 했고, 그래서 저는 일단 지역 편중 없이 그룹을 만들어달라고 했죠.

워크숍을 두 번 했어요. 구청 근처에 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번,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한 두 명씩 뽑아서 한 번, 그런데 다행히 구청 근처에 사는 여성들에게서 반응이 왔어요. 그들이 협동조직을 만들어서 수익사업을 한다고 나서더라고요. 엄청 기뻤죠. 그런데 왠지 나서서 도와주면 이 사업을 망칠까 싶어서, 일단 최대한 개입하지 않았어요. 대신 저는 돈 문제를 관리하고, 룰을 만들어나갔어요. 그리고 사회복지 쪽 공무원들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어요. 제가 떠나면 결국 그들이 이 사업을 맡아야 하는거 잖아요.

재료를 사는 것도 최대한 싸게 대량으로 살 수 있었고, 재료 운반도 지방정부에서 해주다보니 비교적 일이 수월했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막 수입사업을 해보려던 차에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아쉽긴 하죠.


Q. 2년이란 기간이 짧게 느껴졌나요?

반년동안만 더 봐도 어떻게 되는지 알겠는데... 시간이 더 있었으면 했죠. 그리고 제가 같이 일하는 지방정부 사람들이 협조적이었거든요. 거의 활동 마지막에 가서야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아쉬웠죠.

그리고 시간이 정말 많이 필요한 게, 제가 이 사업에 대해 훈련을 받을 때 “주민들을 기다려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이 거기 가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저는 모티브만 줘야 하죠. 사람들이 제게서 모티브를 얻어서 뭔가 조직하면, 그 때 제가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그 기다리는 시간이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일 수도 있는데, 내가 뭔가 던졌을 때, 그 사람들에게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에게 선택할 시간을 줘야죠. 당사자들에게 필요가 없어도, 금전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것만 믿고 끌려오면 곤란하잖아요.


Q. 미련이 남으신 것 같은데, 다시 아프리카로 나가실 계획은 있나요? (웃음)

잘 모르겠어요. 하던 데에서 몇 개월 더 줬으면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장 다른 국가로 나가는 건 좀... 일단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찾아보고 싶어요.  르완다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지역사업을 하려고 노력하다보니까, 정작 20년 넘게 살았던 한국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일들을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타향이 아니라, 제가 원래 살던 곳에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Q. 혹시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지역 사업이 있나요?

지역성을 살리고,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편하게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이웃 간에 소통하면서 살게 된다면 삶의 질도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제 옆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옆집에 살던 사람이 자살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떤 고민들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반면 르완다에 가니까 이웃들끼리 전부 다 알고 지내요. 밥도 같이 먹고요. 제가 다리를 다치니까, 금세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가 다리 다친걸 알게 되더라고요. 그런 점이 문화 충격이었어요. 아직 그 곳에는 이웃 간의 소통이 남아있다는 게 인상깊었죠.

 

Q. 장기적으로는 앞으로 취직을 생각하고 계실텐데,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직업적인 건 아니지만, 당장의 목표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아프리카의 미술과 아름다움에 대해 알리고 싶어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패브릭(천)을 많이 사왔는데요. 패브릭 문양이 화려하고 독특해요. 이걸 이용해서 소품을 만들어서 팔고 싶고, 더불어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 전달하고 싶어요.

기업에 들어간다면 기업 안에서도 사회공헌을 하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기업이 운영하는 문화센터에 들어가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금보다 더 값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사회적 기관이나 공적 기관에 들어가더라도, 역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아씨의 옷깃 부분을 주목해보자. 아프리카 패브릭을 덧대서 만든 것이다.



 

Q. 앞으로 해외 봉사 때문에 해외에 나가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아요.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해외봉사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르완다에 있을 때도 고등학생 두 명이 연락을 해오기도 했고요. 일단 관심을 가졌으면 부딪쳐 보는 게 좋겠죠. 하지만 현실적인 지점도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 갈 때는 순진했어요. 막연하게나마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2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생각은 많이 없어졌어요.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기 때문에, 단순히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론 힘들고, 전문성과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할 것 같아요. 나를 헌신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것을 직업으로서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해요.


Q. 마지막으로 차기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지금 정부에서 청년글로벌 리더를 만들겠다고, 젊은 사람들을 외국에 보내기 위해서 지원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지원 규모도 늘었고, 일반 봉사단원들 숫자도 늘어났어요. 물론 저도 그런 흐름에 힘입어 해외에 나간 케이스죠. 이렇게 청년들에게 해외에 나갈 기회를 주는 것은 정말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규모가 커지는 만큼 내실도 갖췄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을 해외에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도 조금 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갔다 온 젊은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해외에서의 경험은 여기에서는 별로 쓸 데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거든요. 젊은이들이 그 곳에서의 경험을 한국에서도 충분히 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