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도와주면서 인터뷰 진행하는 거 어때요?”
 

미니홈피에 있는 그의 연락처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하니, 이렇게 답변이 왔다.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사를 도와줘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결국 이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독산동의 한 이층집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한 친구의 이사를 도와주고 있었고, 그곳에 나는 한명의 이사 도우미로 불러간 셈이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1년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 뒤 올 8월에 가석방 되었고, 중간에 감옥 인권을 보장해달라며 단식 투쟁까지 벌인 사람치고는 굉장히 건강해보였다. 그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이삿짐을 도맡아서 날랐다. 독산동과 이사할 집이 있는 사당동을 오고가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를 보니, 얼떨결에 온 나도 열심히 짐을 나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삿짐을 다 날라야 그와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삿짐을 다 옮겨놓으니 목과 등에 땀이 흠뻑 났다. 쉴 틈이 생기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그가 먼저 말을 놓자고 했다. 내가 한 살 어린데도 그는 편하게 ‘의석아’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딱 두 번 본 사람과 (한 번은 종교자유 문제가 한창일 때 그의 집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기억 못하고 있었다.) 이삿짐을 같이 나른 뒤, ‘반말로’ 인터뷰를 했다. 


이삿짐을 막 들여놓은 방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주위가 어수선하다.





가석방 후 영화 찍고 있어

감옥에서는 다른 수형자들의 처우를 보고 화가 나
독방사람은 잘 안 건드리니까 내가 나서게 돼

누드 퍼포먼스 하고 주변에서 비난이 많았다
검찰에서 군 법무관 간다고 말한 것은, 신념에 어긋나는 거짓말



 

-머리가 생각보다 짧네. 기르진 않아?

머리 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요즘에 바쁜가보다. 가석방된 이후에 뭐하고 지내?

독립영화워크숍에 참여하고 있어. 충무로에 있는 서울 영상미디어센터 독립영화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데, 세 달 동안 30만 원밖에 안 하고 최신시설의 장비도 편하게 이용해.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두 번째 촬영실습을 통해 작품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야. 영화 학교가 월-토 10시에 시작해서 7시에 끝나서 따로 인터뷰할 시간 내기조차 어렵더라.


-예전에 만든다고 하던 군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떻게 된 거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데, 이곳 저곳에 내봤는데 다 떨어졌어. 시민의 방송 RTV라는 곳에 시청자가 내보내는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어 100만 원 가량 받긴 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내 실력이 부족했지.

-카톡 프로필에 ‘영화 사랑 두 가지만 집중’ 이렇게 써있어. 그러면 지금 그거 두 개만 집중하는 건가?

여자 친구는 없어. 연애 하고 싶네(웃음)

-얼마 전엔 감옥 내 수형자 인권개선을 위해서 감옥 투어를 갔잖아. 그전에 감옥안에 있을때는 단식도 했고.

나도 FTA 반대집회 갔다가 유치장 정도는 들어 가봤기 때문에 밤새 불켜 놓는 거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공무원(교도관)들이 수형자들을 깔보고 반말한다는 것도 병역 거부자들에게 미리 들었고...그래서 나는 이왕 어쩔 수 없이 감옥 가는 거, 편하게 지내자 마음먹었어. 그런데 막상 가니까 편하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생기는 거야.

나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고, 독방생활을 했거든. 독방에 사는 사람들은 시국사범이나 연예인, 재벌 이런 사람들이라서 잘 안 건드려. 그런데 내 옆에 일반방에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대했어. 하루에 30분 운동하고 나머지 시간은 8명에서 13명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정자세로 앉아있거든. 운동해서도 안 되고 잠을 자서도 안 돼. 운동 시간 30분을 주는 시간도 10시, 2시 반, 3시 반 이렇게 제멋대로야. 리듬도 깨지고, 면회를 와도 사람이 기다려야 하고... 그리고 피해자랑 가해자가 만나는 게 아니고 공무원이랑 수형자인데 왜 거기서 상하관계가 생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함으로써, 감옥 내 인권개선은 좀 이뤄졌어?

바꾼다는 게 쉽지가 않아. 불이 너무 어둡다고 하니까, 한동안 불 좀 밝게 해주고 운동시간도 최대한 맞춰주는 시늉은 보이더라. 그런데 내가 서울구치소에서 해남교도소로 이감되어서, 서울구치소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을 거야. 가시적으로 성과 있었던 건 서울구치소 도서관이 1년 동안 닫혀 있었고, 모든 책은 사서 봐야 했거든. 나는 돈이 있어서 책이라도 봤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보는 상황이었어. 안 되겠다 싶어서 구치소장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바로 도서관 문을 열더라고.

과일값이 올랐다면서 과일이 안 들어와서, 또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과일이 다시 들어오고...하지만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지.


-어쨌거나 교도소에 있는 사람은 죄인이잖아. 감옥에 간 사람인만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의견도 있잖아. 더구나 너는 군대를 안가서 감옥에 간 거잖아, 뭐가 잘났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폭력적인 발언일수 있지만, 살인자는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한명을 죽인 거잖아. 하지만 금융사범은 수 백 명을 죽인거랑 다름없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감옥에 오지도 않고 감옥에 오더라도 좋은 방에 살고, 사면당하고 이렇게 되더라? 나는 그런 모순적인 부분에 집중을 해 한다고 생각하고, 약한 사람들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봐. 진짜 나쁜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교도소는 기본적으로 너무 잔인해. ‘케이블 TV를 보게 하자’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게 하자’ 이런 게 아니라 얼어 죽는 걸 막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정말 많은 돈이 교정행정에 쓰이는데 이상하게 낭비가 되는 것 같아.



국군의 날 누드 퍼포먼스, 그리고 양심적 병역 거부
 

-군대를 폐지하자는 생각은 여전히 갖고 있어?

없어졌으면 좋겠지.
 

-대체 그때 누드 퍼포먼스는 왜 한 거야?

당시 국군의 날에 서울시내에서 탱크와 미사일이 나오는 퍼레이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화가 나서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우리나라 사람이 전부 전쟁에 미치고 살상무기에 미친 사람이 아니란 걸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어.

ⓒ 연합뉴스




-실제로 평화 운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기성 퍼포먼스는 평화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하잖아.

내가 밉기 때문에 그런 식의 가면을 쓴 거라고 생각해. 내 퍼포먼스를 기회 삼아 평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더 발언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넘겨버려서 너무 가슴이 아팠어. 이를테면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와 같은 글을 쓰던 사람들이 정작 내가 군대 폐지를 외치고 퍼포먼스를 하니까 “얘 진정성이 없다.” 이렇게 말하니까 슬프더라고.

-군대 문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 왜 너는 그들과 같이 안 하고 혼자 퍼포먼스를 벌였어?

나도 ‘전쟁 없는 세상’ 모임에 참석하고 같이 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 분들은 나의 누드 퍼포먼스를 꺼려했어. “해도 되지만 우린 같이 안 하겠다”고 말했고, 그 분들은 다른 행사를 벌이셨지.
 

- 군대를 없애려면 사실 전 세계에 있는 군대를 다 없애야 하는 게 맞잖아. 스스로 거의 불가능한 소리를 한다는 건 알고 있지?

지금까지 군대가 있었다고 해도 영원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러시아혁명 중국 혁명만 봐도 그래. 시대정신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봐. 나처럼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는 어딘가에 있어야, 그 사람이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복사하는 거잖아. 이 주장을 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군대 폐지'와 같이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단기적 목표가 없으면 운동이 목표를 잃잖아.

일단 그때는 국군의 날에 뭔가 하자였지. 단기 목표를 일단 이루기 위해 나도 시간과 돈을 다 써서 퍼포먼스를 한 건데, 욕도 너무 많이 먹고, 돈도 다 떨어지고...
 

-답답할 때도 많았겠어. 누가 도와주질 않으니까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게 안 좋다는 건 다들 알아.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쉽게 얘기하잖아. 하지만 내가 옳은 주장을 하더라도, 현실적 여건이나 위치 때문에, 거기에 동조하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이니까 함께 하기 싫다’ 이렇게 변명거리를 만들고 현실에서 안주하는거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감옥에 가기 전에, 검찰에게 군법무관으로 복무 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사실이야?

어떻게든 감옥을 가는 걸 연기를 해볼까 싶어서 얘기가 나온 거야. 경찰에서는 병역거부하겠다 말을 했는데, 검사실에서는 군법무관이면 가겠다고 이야기를 한 거지.

-신념에는 어긋나는 발언이잖아.

솔직히 거짓말을 한 거야. 군법무관 갈 생각은 전혀 없는데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런 거였지. 당시에도 굳이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
 

-양심적 병역거부자중에서도 너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교활한 사람이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거라고 의심을 할 수도 있다고 보고... 어지러운 세상이고, 그런 (교활한) 사람들도 오죽 많겠어?





사람들은 의외로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를 잘 믿어
사법시험은 원래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했던 게 맞아
택시기사, 호스트빠를 해본 것은 '삶을 더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시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강의석 닷컴이라는 사업 시작하지만 처절한 실패 

"
기대를 많이 받던 아들인데 이제 아무것도 아니잖아. 전과자이고... "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강의석의 과거, 그리고 궁금증
 

-너는 단순히 튄다고 욕 먹는게 아닌 것 같아. 비난받는 이유의 대부분이 일관성 없는 행동이나 여러 가지 루머 때문인데, 특히 미니홈피에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묘사 해놓은 ‘야설’을 써놨다는 루머는 아직도 유효한 것 같은데?

날 처음 만나서 친해지게 되면 “의석아 미안한데 물어봐도 돼?”라며 묻는 질문들이 몇 개 있어. “여자 친구랑 섹스한 글 올린 게 정말이야?” 이건 꼭 물어보더라고 (웃음) 사람들이 인터넷 글을 생각보다 신뢰해. 나는 정말 사람들이 루머를 그렇게까지 믿는지는 몰랐어.

스누라이프(서울대 커뮤니티) 에 나에 대한 의혹을 풀려고 글도 썼어.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루머가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고.
 

-사법시험은 왜 본다고 한 거야? 체제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는 ‘군대 폐지론자’가 사법시험을 본다고 하니 다들 이상하다고 여겼어.

사업을 했는데 (강의석 닷컴) 그 사업이 안됐어. 너무 힘든 상황에서 사법시험이라도 봐서 군대를 연기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어. 그리고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면 사람들과 일하는데 있어서 구심점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변호사가 기득권을 수호할 수도 있지만, 그 기득권에 맞서서 싸울 수도 있잖아.

사실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어. 2학년 때쯤? 사람들이 종교자유 집회에 너무 안 오는 거야. 사람들이 내가 고등학교 때 유명해지니까, 잠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실망을 많이 했어. 그때 당시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종교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거든. 내가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 라이센스를 가진 변호사라면 종교자유 집회에 1명이 모일 게 10명이 모이고, 10명이 모일 게 100명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하지만 사법시험을 본다고 했던 건 현실과 타협한 게 맞아. 돈벌이도 생각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거든. 내가 모순적이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어. 내 마음의 100중에 1~2정도는 싹 다 잊고 사법시험 합격하고 돈 많이 벌고 예쁜 아내 얻고 이러고 싶은 마음도 있어.
 

-안정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제의식이 더 크단 말이지?

세상을 넓게 봤을 때 부조리한 부분이 너무 많아. 감옥에서도 대단한 일을 벌여 봐야겠다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나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독방에 있으면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어. 그래서 내가 말하면 더 먹힌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나 잠자는 거 방해하면 폭력으로 대응하겠다.’ 이렇게 써 붙였는데도 징벌을 못주더라고. 사실 다른 방에서 그랬으면 난리가 날 거야. 그래서 정봉주씨나 곽노현씨 올 때 기대한 부분도 있어. 물론 자기 사건 때문에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감옥 인권을 어느 정도 개선해줄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좀 안타깝게 느껴지더라고.
 

-문제의식이 그렇게 넘치는 사람이 권투선수, 호스트바, 택시기사 이런 도전은 왜 해본거야? 솔직히 뜬금없다고 생각했어.

권투도 원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했어. 사실 그때는 언론플레이를 했어 (세계 챔피언 된다고). 검색어 순위도 일부러 올리고 그랬어. 당시에는 계산적으로 나를 판 거야. 호스트바는 그런 의도로 이야기 한 게 아니었고...

대광고 종교 자유 재판이 5년 이상 진행되었고, 처음에는 변호사가 되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그 부분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 변호사라는 라이센스가 있으면 사람은 모을 수 있었는데 단지 거기까지만 일 것 같고, 사회 전반에 대한 바꾸는 건 어렵다고 느꼈어. 그래서 법 공부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지.

또 사람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도 들었어. 사실 친구들하고 스몰토크를 한 적이 없어.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와 집만 오가면서 친구들과 공부 이야기나 학생회 이야기만 했어. 고등학교 졸업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여자 친구에 대해 물어본다든가 술을 한 잔 할 경우도 없었고... 사람을 잘 몰랐던 것 같아. 종교 자유가 있고 법이 완전해도 사람들은 힘들어 하겠구나 그때 깨달게 된 것 같아. 서로간의 비교, 열등감, 연인관계 등으로도 힘들잖아. 그래서 3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고민이 시작됐고, 하고 싶은 일을 찾다보니 택시기사를 하게 됐지.
 

-너무 쉽게 선택한 거 아닐까? 택시기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택시기사 쉽게 선택한 건 맞아. ‘택시기사 모욕한다.’ 단순히 체험학습용으로 생각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인정하는 부분도 있어. 주변 사람들이 “넌 엄청 파괴적이게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이기적이다.” 이렇게 말하거든. 나 역시 그런 점을 인정하고, 내가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름대로는 크게 고민했던 것 같아. 삶의 목적도 잃고, 내일은 뭘 해야할까 고민도 많이 하고... 그때는 엄마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어 “삶을 더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엄마는 내가 행복한 걸 하라고 하셨어. 정말 방황하던 시기였지.
 

-방황을 거친 후에, 군대 폐지 운동에 앞장섰잖아. 그런데 그 운동이 국군의 날 이후에는 잠잠하다가 2010년쯤인가 갑자기 강의석 닷컴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사업을 하더라. 일종의 심부름 센터로 기억하는데 그건 왜 하게 된 거야?

군대 퍼레이드 때문에 잡혀갔다가 나오고 그 다음부터 운동이 흐지부지 됐어.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 그리고는 이제 영화를 만들어야 되는데 (다큐멘터리 ‘군대’) 도저히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거야. 나름 대작생각하고 만들었는데 편집하는 것도 너무 머리 아팠고... 그렇게 시간이 1년이 훌쩍 지나가더라.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공부를 해볼까 싶었어. 왜냐면 내가 법 공부가 재미없어서 그만둔 건 아니었거든.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둔 거였어. 그나마 공부는 재미있어 하니까 일단 시험 준비를 했어. 그런데 당시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신용불량자로 오랜 생활을 하셨고, 엄마랑 이혼하고 3년 동안 한 번도 안 봤는데,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니까 이미 의식이 없으셨어.

그때를 계기로 왠지 모르게 아빠한테 뭔가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 아빠가 열심히 안 해서 사업이 실패한 거라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원망이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잘 해내는 걸 보여주겠다고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시험 준비를 접고 사업을 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안 되더라. 그때 아빠를 이해하게 된 거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을 벌 수 없겠구나. 제도적 측면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경제가 안 좋으면 사업이 안 되는구나 생각했지. 그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 월급을 줄 수가 없는 거야. 사채를 200만 원 정도 쓰기도 했는데, 다음 달 되면, 또 200만 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거야.

도무지 사업이 유지가 안돼서. 고액과외를 시작했어. 반포동 가서 아파트마다 전단지 붙이고 과외를 했는데, 정말 돈을 많이 주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벌어도 사람들 월급주면 남는게 없고...정말 힘들었어. 과외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외를 하니까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힘들더라.


-사업이 망하고 감옥 가기 전까지는 사법시험 준비한 거야?

남은 게 아무것도 없더라. 그나마 잘하는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손에 안 잡혔어. 그래서 그때 스타크래프트를 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야. 폐인처럼 5달 동안 게임만하고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봤지. 그 시절에 정말 좌절감이 컸던 것 같아. 이제 나는 잘하던 공부도 못하고,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대판 싸우다가 가는 것도 아니고 끌려가듯이 감옥에 가는구나 싶어서... 어쨌든 게임은 재미있더라고. 원래 게임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집에 있는 강아지 똥오줌도 안 치우고 게임을 할 정도로 해보니까 이해가 가더라.



사람들끼리 서로 못 믿는 세상이 슬프다


-이제 어쨌든 새로운 시작이네. 요즘 만드는 영화 내용은 뭐야?

1차 실습에서 작품 만들었는데 정말 쓰레기야 (웃음) 너무 말도 안 되게 나왔어. 어떤 거냐면 김예슬씨가 고대 관뒀잖아. 그걸 모티브로 한 대학생이 대자보 붙이고 관두는 걸 극화한 건데 머릿속에 생각한 대로 안 나오지. 김예슬씨한테 보내기도 미안하고...

2차 실습에서 만드는 작품도 부족할 거야. 스토리나 화면도 그렇고. 대사도 전달이 안 되고 등등... 일단 ‘청구서’라고 신춘문예 당선된 희곡을 각색을 할 계획이야. 작품 쓰신 분에게 허락은 안 받았는데, 왜냐면 허락을 받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이 내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으니까 부끄러운 거야. 일단 만들어서 그 분에게 먼저 보여주고, 잘됐을 때 제대로 만들어 봐도 되냐고 얘기를 해보고 싶어.


-그럼 이제 운동할 생각은 없고? 종교 자유, 군대 폐지, 감옥 내 인권 이 세 가지 운동 중에 하나라도 말이야.

연락처는 공개되어있으니까 종교자유 문제쪽에서는 상담 요청이 오기도 해. 다만 아무래도 영화학교에 집중하다보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연락달라고 할 순 없지. 이번에 감옥투어 가는 것도 고민 많이 했어.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걸 먼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일단 감옥 인권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 같이 갈 사람이 20명은 모일 줄 알았는데 8명밖에 안 모이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에 소속되어 있거나 학생조직 기반으로 운동을 하잖아. 그런데 너는 그런 틀에서 벗어나있으니까 더 힘든 거잖아. 조직에 속해서 일해볼 생각은 없어?

그런데 들어가서 일을 할 생각은 아직은 없어. 구속노동자 후원회의 활동가를 해볼까 아니면 종교 자유 정책 연구원에서 일을 해볼까 이정도 생각. 일단 당장은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려고.
 

-기존에 해왔던 운동 방식, 이를테면 단식이나 퍼포먼스는 안 할거야?

다양하게 해봐야한다고 생각해. 기존 방식에 회의를 느끼지도 않고, 어떤 방식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감옥에서도 법적으로 고소도 하고, 단식도 같이 하면서 전방위적으로 운동을 한 거거든.

-학교에 다시 다닐 생각은 없어?

아직은 없어. 그런데 엄마는 학교 꼭 가서 졸업은 하래. 학사 있는 거랑 없는거랑 얼마나 다르냐고 하시더라. 그런데 내가 아니라는데 엄마가 어쩌시겠어. 
 

-엄마는 걱정 많이 하시겠다.

기대를 많이 받던 아들인데 이제 아무것도 아니잖아. 전과자이고...
  

-20대가 힘들다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 너도 서울대 다녔지만 이젠 서울대 학생이 아니고 전과도 있어서 취직할 때가 없잖아. 천하의 강의석이 청년 문제를 겪고 있네?

나는 상황이 좋은 편이야. 다른 친구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나는 엄마도 직장이 있고, 누나도 사업을 하니까 내가 걱정 해야할 가족은 없잖아. 하루에 만 원씩 용돈 받고 살지만, 내 고민만 하면 되니까.  

다만 연애를 하려고 하는데, 연애를 하려면 밥도 먹고 모텔도 가고 이래야 하는데 돈이 없잖아. 그래서 나도 연애를 시작하기엔 부담이 크지. 그리고 지금 만원으로 생활하는 게, 지하철비 3000원 쓰고, 밥먹고 나면 남는 게 없거든. 뭔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어도, 투자를 해야 하는데 투자를 못하잖아. 학원을 다니려고 해도 학원에 못 다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돼.

영화를 보고 싶어도 영화를 볼 수 없고, 책을 사고 싶어도 책을 못 사고. 부모님에게 의존을 해도 힘든데, 용돈이 끊기면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거지. 나를 포함한 20대는 자기 하고싶은 걸 하려고 해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벌기 위해 또 시간을 써야 하잖아. 그게 너무 안타까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줘. 자유롭게.

내가 친구랑 클럽을 가려고 길을 지나가는데 차가 오는 거야. 그 차가 멈출 줄 알았는데, 차가 나를 피하지 않고 내 발을 깔고 지나간 적이 있었어. 황당했지. 발이 깔렸다고 하니까 차 주인이 “나는 이태원 주민인데 왜 너는 술 취해서 주정 부리냐”고 말해서, 너무 열이 받아서 싸우다가, 병원 가서 엑스레이 찍자고 하니까, 장난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죄송하다고 말하더라고. 그 때 너무 화가 났어. 밟았으면 느낌이 났을텐데 오리발 내밀고 이러는 모습이 싫더라. 물론 안 다치고서도 그런 척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사고나면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입원하고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 아무튼 그런 구조가 너무 슬프더라고.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또 ‘프레스바이플’이라는 곳에서 감옥편지를 연재하면 좋겠다고 해서 자료를 보내줬어. 그런데 두 묶음을 보냈는데 한 묶음은 안 받았다는 거야. 찾아봤는데 없대. 나는 "일단 찾아봐주시고, 없으면 가서 직접 찾아보겠다"고 했어. 그런데 그쪽에서 화를 내는 거야. 갑자기 “역지사지를 모르냐” 이러면서 말이야.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봤으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정말 억울하더라. 그런데 5분 뒤에 찾았다고 죄송하다고 하더라고...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잖아. 토론할 필요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오해받으니까 억울했어. 억울한 감정은 진짜 견디기 힘든 감정 같아. 인간끼리의 믿음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



강의석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그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의혹의 시선들에 대한 답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대중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진심을 믿지 못하고, ‘정치 하려고 저래’ ‘관심병이 도졌다’ 식으로 그의 행동을 폄하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수많은 비난을 견뎌내면서,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 거부까지 한 그에게, 믿음을 보내느냐 마느냐는 개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그가 마냥 억울한 느낌만은 받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