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던 경영학과 김예슬씨의 글은 온라인을 타고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고, MBC와 경향신문 등 주요 매체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에 김예슬을 치면 바로 자퇴, 김예슬 선언, 고려대 자퇴가 연관검색어로 뜰 만큼 유명해진 그 이야기를 3월이 다 저물어가는 오늘, 바로 지금에서야 끄집어내려 한다.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솔직하면서도 따끔한 이야기가 나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예슬씨가 대학에 대해 내린 평가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수긍하진 않았었다. 입학을 앞두었을 때만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수업을 들으며, 학문적 자극을 받으며 숨겨져 있던 배움의 욕구를 틔우고,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 철학, 사회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업들이 준비도 덜 되어 쓸모가 부족한 학생들을 사회로 배출한다고 비꼬아도, 대학만큼은 그런 학생들을 위해 이유 있는 변명을 해 주리라 기대했다. 학문의 전당이란 말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대학이 과연 학생들에게 어떤 곳으로 기능해야 하는지 깊이 있게 고민하는 이가 대학 내에 많이 존재하길 바랐다.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대학을 난도질할 요량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그러나 대놓고 건드리지 않았던 성역을 들춰낸 것도 의미 있었지만, 오히려 마음을 동하게 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공개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행위는 안락하고 견고한 체재 밖으로 월담을 시도하겠다는 본인의 의지를 굳건히 밝혔다. ‘대학생’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많은 혜택과 특권을 내려놓고 자연인 그 자체로 돌아가겠다는 용기 있는 선언이 내겐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우리 사회의 인식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사회로 책임을 돌릴 것도 없이 바로 나 자신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라고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흥미보다 컴퓨터 조립, 요리, 아르바이트 등 다른 쪽에 관심이 많았던 동생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했을 때, 인생선배랍시고 해 준 말은 ‘여기서 살려면 싫어도 대학은 꼭 가야돼.’라는 초라한 자기고백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대학 졸업장이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르려는 동생을 막고 만 것이다. 결국 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꿈꾸며 학교생활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득 스스로 피어나고자 하는 싹을 나기도 전에 꾹꾹 눌러버린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용기 없는 이 시대의 대학생인 나는 그 결정이 장기적으로 더 맞다고 생각한다.


 고백한다. 나는 용기가 없다. 오로지 맨몸과 맑은 정신 하나만 가지고는 이 세상에 뛰어들 용기가 없다. 규정된 틀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혹자의 말처럼 잔뜩 ‘쫄아 있기’ 때문에 무얼 시도할 용기조차 잃은 지 오래다. 모든 것을 이 사회와 대학과 국가에 돌리지는 않겠다. 자립할 수 없는 미성숙한 사고와 대학생이라는 직위와 대학 졸업장만은 사수하고 싶은 못난 이기심을 지닌 나 자신을 고백한다.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단단할 대학 사회일지라도 용기 있게 작은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던 김예슬씨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대학에 품었던 이상과 내가 맞닥뜨리는 현실이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면서도 무사히 졸업하려 애쓸 것이다.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해 부끄럽다.


 그러나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이 세상에 자그마한 파장을 일으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의외로 여럿 존재한다는 것을 안 이상, 김예슬씨와 같이 당당히 세상과 맞서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나는 달라지겠다. 체제 밖으로 나가려는 도전은 접어둘지라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며, 그렇게 수업시간에 되풀이해서 듣던 말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겠다. 내 삶을 꾸려나가는 가장 큰 주체로 행동하며 욕구와 목적을 잊지 않고 올바로 나아가겠다. 머리와 가슴을 찌르고 울렸던 그녀의 글, 그때 느꼈던 충격을 늘 간직한 채 살리라. 나는 비겁하고 용기가 부족하지만, 방금 새롭게 한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