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들었던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대학생일 때에는 자기만의 경험을 많이 쌓으세요. 무조건 많이 듣고 보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하고요.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 분명 양분이 되고 자신의 자산이 될 겁니다.” 그 말씀을 들은 건 2009년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전부터 조금씩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규율처럼 이미 정해진 빡빡한 고등학교 생활과 달리 여유시간을 만들 수도 있고, 또 접할 수 있는 문화의 범위도 깊이도 넓어진 풍요로운 시기에- 널려 있는 다양한 문화생산물을 낚지 못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하는 강연만 찾아 들어도 한 해에 명사를 족히 12명은 만날 것이다. 또 자체 갤러리나 문화 센터를 보유하고 있는 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더 많아진다. 나 역시 얼마 전 무료로 사진전을 관람하는 혜택을 얻었다. 지난 주 금요일에 끝난 <제3세계 여성 인권전>이 그것이었다.


 



 규모가 큰 사진전이나 평소 관심 있던 포토저널리즘 관련 전시회는 꼭꼭 필기해 놓고 가려고 애썼지만, 정작 사진전에 발걸음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연히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보다 발견한 이 전시회는 특히 관심 있는 ‘여성 인권’에 대한 것이었고, 그 덕에 마법처럼 홀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갤러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한적해서 놀랐다. ‘제3세계 여성이라는 게 이렇게나 주목받지 못하는 주제였나?’, ‘사람들이 전시회 일정을 모르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오히려 사진과 안내 데스크 1명 말고는 광활히 넓은 이 공간에서 오롯이 감상에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사진전은 초행길이었는데 다행히 친절한 안내서가 있어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며 볼 수 있었다. 물론 포토저널리즘이라고는 해도 신문처럼 꼼꼼히 논리와 사건 개요를 파악하는 텍스트가 아니기에,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관람했는데- 도움글 덕분에 짧게 머무를 수 있는 생각을 좀 더 나아가게 만들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등 제3세계 국가를 간략히 소개하는 짤막한 글만 보더라도 그곳의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들은 모두 전쟁, 학살 등 대형 참사를 겪은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여성이었다. 어린 아이와 부녀자 할 것 없이 신체적, 성적 피해에 무방비한 상태로 놓여 있던 것이다. 저마다 약간씩 그 모양새는 달랐지만 여성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테두리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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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사진전의 대표작(보도자료에 실렸던 사진)은 ‘콩고의 눈물’이었다. 아직 18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는 성폭력을 당해 한 병원에서 눈물짓고 있다. 후투족 반군들로부터 강간당해 임신을 했다가 제왕절개 수술을 잘못 받아 피스툴라(성폭행당한 뒤 나뭇가지, 꼬챙이, 총부리 등으로 성기에 상해를 입은 여성의 질과 요도 사이에 생기는 제3의 누관을 말한다) 증상을 겪고 있는 이 소녀의 눈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동안 다른 국가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몹시 무심했던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 사진 앞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사진 한 장 한 장이 주는 생생함과 강렬함은 생각보다 위력적이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 가진 무거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여성들, 산후 합병증으로 눈 감은 젊은 산모, 성폭력이라는 말조차 어렵게 느껴질 만한 7, 8살 어린이들, 엄마가 죽은 사실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까지 어느 것 하나 눈길을 잠깐 던지고만 말 사진이 없다. 미학적인 부분보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데 더 초점을 맞춘 이번 사진전은 제3세계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살기에 얼마나 힘겨운 곳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진 중 하나가 바로 부르카를 쓴 어느 여성(나이나 생김새를 분간할 수 없다)이었다. 극심한 이슬람주의와 가부장제로 인해 교육 자체를 허용 받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부르카를 써야만 학교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교육을 받아야 자신들의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직접 나설 수 있고, 그 움직임들이 모여 사회 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을 알기에 관람하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들의 삶이 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참 많은 것들이 달라져야 한다. 인식과 사회 분위기가 달라져야 하고, 피해를 받더라도 즉각적인 치료와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며, 여성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처음에는 여성 인권에만 머물렀던 생각의 그물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전쟁 반대와 평화 수호로까지 나아갔다. 모든 전쟁에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지만 실상을 파헤쳐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를, 조용히 끝나고 만 사진전에서 발견했다.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한 번 더 자세히 훑고 나왔다. 혹시나 놓친 게 없을까 해서. 사진전을 나오며 오늘 받았던 그 복잡다단했던 느낌과 강한 여운을 꼭 안고 살리라고 다짐했다. 3월 19일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걸음을 멈추고 오랜 시간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본 일,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