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21일 주요 기업의 채용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정형화된 채용 기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역량을 지닌 숨은 인재를 가려내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으로, 이른바 ‘스펙’이라고 불리우는 학점, 토익점수 등의 기존 전형 요소보다 구직자가 가진 열정과 도전정신, 전문성, 창의성 등을 중요 요소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실제로 스펙과 관계없는 파격적인 채용시스템을 일부 마련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으며, 스펙을 채우는 공간, 즉 자소서 입력칸수도 줄어드는 추세다.

언론은 전경련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서 ‘긍정적 프레임’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마치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지 않아도 내면의 인성만 다지면 좋은 기업에 입사할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 것과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스펙 대신 스토리를 보겠다는 기업 채용의 신트렌드는 사실상 조삼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리 역시 또 하나의 스펙이기 때문이다. 고함20은 오디션 형식의 채용시스템인 SK 바이킹 챌린지에 대해 보도한 바 있는데, 한 구직자는 “스펙을 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바이킹챌린지 합격자들은 아프리카 마을에서 사진관을 운영한 경험, 히말라야를 등정한 경험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채용방식을 비판한 바 있다.

스펙 대신 기업들이 요구하기 시작한 ‘자신만의 스토리’는 사실상 스펙보다 더욱 더 만들기 어려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 대강 기업이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기준에 맞게 남들이 하는 방식을 통해 준비하면 갖출 수 있는 스펙과는 달리,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이 밟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할뿐더러 특별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금전적, 시간적으로 더 많은 투자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만 반짝 (그것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되는 것과 비교해,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 생애’에 걸쳐서 자기 서사를 만들어야 하기에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이는 대입 전형에서 수능 대신 입학사정관제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면서 빚어진 것과 비슷한 문제들을 유발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선발 기준에 대한 혼란, ‘스토리’라는 스펙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과잉 경쟁 등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보도자료 말미에 “구직자들도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천편일률적 스펙 쌓기보다 자신만의 장점과 열정을 스토리化하여 부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언제까지 구직자들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바뀔 때마다 그것에 따라가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힘들게 스펙을 쌓으라고 하면 그만큼 고생하고, 그보다 더 힘든 스토리를 만들라고 하면 그것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구직자가 ‘을’의 입장이라고 해도 불합리하다. 이러한 채용시스템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강조하는 최근의 채용 동향은 박근혜 정부가 약속했던 공약인 스펙초월채용시스템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당시 필수직무능력 몇 가지만 갖추면 스펙에 관계없이 취직할 수 있도록 하는 직무표준을 만들 것이라 했다. 정부는 공약 이행을 위해 직무표준과는 거리가 먼 ‘스토리’, ‘열정’ 따위의 추상적인 능력을 구직자에게 요구하는 기업들의 세태에 대해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