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객의 色 : ‘계급’ - 계급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강요하는 <설국열차>
 
“많은 생각이 드는 영화다.” <설국열차>를 본 친구들에게 들은 말이다. 영화를 본 뒤 많은 생각이 드는 건 일견 당연한 일이다. 킬링 타임용 영화라 할지라도 생각할 거리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설국열차>를 보고난 뒤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는 말은 의아했다.
 
<설국열차>는 관객들에게 계급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강요한다. 현실에도 계급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계급의 존재를 느끼기 어렵다. '설국열차'에서 승객이 자리한 기차의 칸은 곧 승객의 계급을 의미한다. 어떤 칸에 있느냐에 따라 승객의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일렬로 줄지어 달리는 기차에서, 꼬리칸에 있는 승객은 최하층 계급이며 앞 칸으로 향할수록 사람들의 계급이 높아진다. 계급의 존재 유무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레 본인이 어느 계급에 있는지, 계급이 어떻게 나뉘는지 고민한다.
 
등장인물 간의 대화도 역시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을 강요한다. 화려한 액션이 주를 이룬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는 대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각 계급을 대표하는 승객들은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며 계급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계급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공간에 계급에 대한 대사까지 사회과학 책에 나올법한 말들로 나열된다. <설국열차>는 관객들에게 계급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강요한다. 그러다보니 극장 밖에 나와서도 많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2. 차크렐의 色 : ‘제3의 세계’ - 남궁민수를 통해 본 <설국열차> 밖의 세계
 
세계를 뒤집으려는 자와 세계를 탈출하려는 자, 같으면서도 다른 목적을 가진 인물이 균형을 이루며 <설국열차>를 끌고 간다. 세계를 탈출한다는 건 자신이 공고히 설정해 둔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머물렀던 곳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자못 낭만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세계에서 탈출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치 그 세계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일 정도로 '설국열차'는 철저히 폐쇄적이다. 열차를 만든 윌포드는 그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창조신으로 향유되고 있다. 그가 설국열차라는 세계를 만들었으며 그 밖은 종말이다. 심지어 세계를 뒤집으려는 목표를 가진 커티스마저도,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며 세계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를 유일하게 전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남궁민수다.
 
크로놀을 통해 남궁민수는 ‘땅’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실 칸에서 그는 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요나에게 이를 보여준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인간은 전부 다 이걸 밟으면서 살았다고. 남궁민수에게 땅 위의 기억은 꽤 크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이 사실상 ‘무’가 된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남궁민수는 육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설국열차 내에서 그런 상상은 남궁민수만의 것이다.
 
제3의 길을 이야기하는 남궁민수는 전형적 선악 구도 위에 질문을 던진다. 세계 밖은 어떤 곳인가, 설국열차 이전의 세계는 과연 어땠기에 남궁민수는 계속 그 기억을 놓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설국열차라는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인가. 여기서 영화는 역동성을 찾는다.
 
감독은 남궁민수를 통해 한국사회에도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선악 구도, 여야 구도, 민주화와 산업화 구도 등의 이분법적 구도로 인해 온갖 분탕질이 벌어지는 요즘의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시각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며 넌지시 이야기한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길도 있다고, 꼭 대조되는 두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까지는 새로운 길을 찾아갈 여지가 있다.

 

3. 사루비아의 色 : ‘예측 가능성’ - 영원회귀형 열차 안의 진부하고 허황된 
 
확실히 화제작은 화제작이다. 빙하기와 인류 멸종 그리고 ‘영원회귀형’ 열차라는 대략의 스토리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영화관을 찾았다. 이러한 ‘흥행 돌풍’은 대체 이 영화가 어떻기에? 라는 대중심리에서 발현되는 일종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본 영화는, 물음표는 물음표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끝맺고 말았다. 꼬리칸 하층민들의 반란은 비교적 온건한 폭력을 동원하고, 예상한 지점에 반전들이 얌전히 놓여 있으며, 군데군데 감각되는 서스펜스와 진중한 롱테이크 씬 사이에는 치밀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즉, 영화는 메시지보다 설정 자체에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디테일한 열차 칸별 묘사나 총격 장면 속 예측 가능한 긴장감, 메이슨 총리가 직접적인 언어로 쏟아내는 연설 장면 등은 영화 연출이 얼마나 모범적인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열차를 운영하는 최고 권력자 윌포드는 반란 주도자 커티스에게 시스템의 견고함에 대해 매우 ‘친절하게’ 일러주며, 배신감과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린 커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이 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정의’라는 클리셰에 충실히 임한다. 희망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부응하려는 듯, 열차가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도 두 어린 생명은 다친 곳도 없이 살아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영화는 폐쇄된 사회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의 고착화와 권력구조의 은밀한 작동 등 이른바 ‘생각해볼 거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지나친 ’보여주기‘에 초점 맞추어져있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리고 디테일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메시지는 진부해지고 말았다. 혁명이나 시스템 등의 상징들이 대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단순하고 시시해져버렸다. 
 

 
4. 박주리의 色 : ‘창문’ - 열차의 꼬리칸에는 창문이 없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에는 창문이 없다. 창문을 갖지 못한 꼬리칸 사람들은 이따금씩 마주하는 앞칸 승무원의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세계관을 만들어나간다. 커티스는 억압적인 이미지의 메이슨 총리와 승무원을 바라보며 열차의 엔진을 점령하는 것만이 이 상황을 역전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굳힌다.
 
앞칸으로 전진할수록 창문은 더욱 많아지고 그 크기도 커진다. 하지만 창문의 기능은 제한적이다. 교실칸의 작은 창문은 설국열차의 체제를 거부한 사람의 최후를 보여주는 교육적인 용도로만 사용된다. 앞칸의 승객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한 나머지 창밖의 세계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하얀 지옥으로 변한 바깥 세계와 자신들의 안락한 처지를 비교했을 것이다.
 
창문이 없는 곳은 꼬리칸만이 아니다. 열차의 제일 앞칸이자 엔진이 있는 곳에도 창문이 없다. 윌포드는 여비서, 빨간 쪽지, 길리엄 그리고 전화기를 통해 바깥 세상과 교류한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열차의 폐쇄된 생태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은행의 금고문을 연상시키는 철제 문 너머에서 그는 자신의 관심사에만 매몰되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간다.
 
오로지 남궁민수만이 창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한다. 그는 매년 예카테리나 다리를 통과하는 순간마다 추락한 비행기를 관찰하며 바깥세상의 날씨를 짐작한다. 앞칸으로 전진하는 순간에도 바깥 세상에 대한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어떤 관객은 68혁명의 유명한 구호인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엔진을 점령하기 위해 전진하는 커티스와 열차를 유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윌포드 사이에서 “내가 진짜로 열고 싶은 문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라고 절규하는 남궁민수는 관객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많은 사람들이 설국열차의 메시지를 폐쇄된 시스템에 종속된 채 갈등을 겪는 두 세력과 그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읽어내는 이유다.
 
창문의 비유는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생들은 창문 하나 없는 학원과 자습실을 오가며 생활한다. 강남과 종로, 노량진에 있는 대형 재수학원, 토익학원, 각종 공무원 시험 준비학원에도 커다란 창문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설국열차의 앞칸 사람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가진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상경한 많은 대학생, 시험 준비생들은 창문 없는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다.
 
남궁민수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지 못했다면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열차의 꼬리칸, 엔진칸에도 창문이 있었다면 커티스와 윌포드의 결정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 그 전에 창문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과연 다른 세상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5. 지야의 色 : ‘엔진의 당위’ - 1명을 죽일 것인가, 10명이 죽을 것인가 

설국열차의 주인인 윌포드는 그 존재만으로 양면성을 갖는다. 그는 살아남지 못하는 혹한으로부터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구세주 같은 존재이며, 동시에 그 혹한을 빼닮은 계급 사회를 구현한 악마다. 열차의 질서를 유지하는 그는 내내 엔진의 당위를 이야기한다. 엔진이 계속 굴러가기 위해서, 다시 말해 누군가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 일정하게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열차 내 성자라고 칭송받는 길리엄마저 그 당위에 완벽히 동의한 듯 보인다. 

인구는 차고 넘치고 꼬리칸 사람들은 꾸준히 애를 낳는다. 그리고 잘 죽지 않는다. 열차 속 해양 생태계를 위해 오로지 1월과 7월에만 산채로 회를 뜨는 열차 내 초밥집처럼, 윌포드는 일정하게 인간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에 힘쓴다. 모든 사람이 오래도록 이 열차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이라면 고의로 1명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10명을 죽게 놔둘 것인가. 영화 <설국열차>는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한다. 인류와 시스템을 유지시키며 간간히 회 떠지는 삶을 반복하기보다, 설령 바퀴가 굴러가지 않아도 삶이 계속될 수 있는 희망에 기댄다. 설령 인류 문명이 원시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열차 안의 세계보다 낫다는 거다. 봉준호 감독은 세계의 탈출로 무한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희망에 동의하지는 않은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 만화 <설국열차>는 전자를 택한다. 그게 모두를 살릴 수 있다고 믿은 탓인지 아니면 살아남는 누군가에 결국 자신이 포함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엔진칸으로 향하던 정의로운 주인공은 엔진과 시스템을 계속 지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엔진칸에 남아 침묵한다. 
 

 
6. 인페르노의 色 : ‘묵직한 디스토피아’ - 관조함으로써 소모하지 않았다.
 
봉준호는 기존에 만들었던 작품들과는 다르게 <설국열차> 속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은유가 없고, 인물간의 감정 선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설국열차'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사관’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어둡고, 차가울 수밖에 없다.
 
계급투쟁을 다루면서도 액션으로만 일관하지 않으며 ‘꼬리 칸 반란군’의 체제 전복에 대한 열망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영화의 온도가 뜨겁지 않기 때문에 흡입력은 약하다. 적어도 ‘꼬리칸 반란군’에 감정을 이입해서 한 칸 한 칸 전진할수록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대신 관객들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하나 세운다. “대체 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봉준호의 의도는 여기에 있다. '설국열차'라는 세계를 ‘관조함으로써, 소모하지 않는 것’이다.
 
'설국열차'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조이며, 세계다. 자유의지가 있는 꼬리칸 사람들이 억압된 세계를 깨기 위해 앞 칸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며, 주인공인 커티스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시도한 것으로 설정돼있다.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왜 투쟁을 하는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세계’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봉준호는 ‘설국열차’가 단순히 계급투쟁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도구로 쓰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설국열차’라는 세계가 헛되이 소모되는 것을 막았다. 그의 의도대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중심축이 흐트러지지 않는 묵직함을 보여줬다.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돌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관객들조차 이 여정에 희망을 갖고 바라보지 못하는, ‘설국열차’라는 디스토피아에는 묘한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