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도 영혼이 있다. 상점을 여는 상인들의 모습. 평상에서 노인들이 두는 바둑. 매일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걸음. 거리 위의 풍경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 거리는 사람의 일상을 닮고, 사람들은 거리를 닮는다. 거리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거리가 사람을 잃어버릴 때 거리는 죽고, 죽은 거리 위의 사람들도 죽어간다. '제물포 뒷역'(일반적으로 제물포 2번 출구 일대를 북부역, 또는 뒷역이라고 부른다)에서 사람을 잃고 죽어가는 거리와 그곳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인천대가 송도로 옮겨가고 4년이 흐른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2009년 9월 이후 근방의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제물포역 2번 출구 앞에서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들도 자취를 감췄다. 상점들은 거의 다 셔터가 내려가 있거나 임대문의 관련 종이가 붙어있었다. 황량했다.


'과거의 영광' 뒤로 한 제물포 상권

한때 제물포 뒷역은 3개의 대학(인천대, 인천전문대, 재능대)이 모여 있는 상가 밀집 지역이었다. 인천대가 아직 제물포에 있던 시절, 뒷역은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학생들로 늦은 시간까지 불야성을 이뤘다. 상권의 황금기였다. 대학가이면서 역세권인 거리에서 점포들은, 하루에 적게는 70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 가까이 매출을 올렸다. 역을 등지고 서있으면 왼쪽으로는 먹자골목의 식당과 분식집들이 수두룩했고, 오른쪽으로는 술집과 고깃집 등이 거리를 밝혔다. 상점들도 많았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하지만 인천대가 떠난 이후 제물포의 상권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일 점심시간이었지만, 역에서 청운대학교까지 걷는 동안 스무 명 남짓한 대학생들과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 한두 마리만 볼 수 있었다.



석정로길의 상점들.


제물포역에서 옛 인천대길인 석정로를 따라 청운대 방향으로 걸었다. 인천대가 이전하기 전에는 길 한쪽을 가득 채웠던 인쇄소들은 간판만 남아 있었다. 청운대 입구 건널목에 다다르자 아직 영업을 하는 인쇄소가 보였다. 인쇄소 주인은 “이제 이 길에 인쇄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른 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저쪽 거리(석정로 202번 길)의 양식집 사장님은 남의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자신은 30년을 해온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라며 “청운대가 들어왔지만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청운대학교 정경.


인쇄소에서 나와 청운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고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가 이전한 왼쪽은 공터로 변해 있었다. 교정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숱한 인천대생들이 가을을 보낸 중앙공원에는 단풍이 지고 있었다. 한두 명의 학생이 도서관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올 3월에 개교한 청운대는 인천대의 빈자리를 메워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청운대 학생 2000명(신입생 375명을 포함하는 재학생 1500명, 산업체위탁교육생 500명)은 과거 인천대와 전문대를 합친 2만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학생들은 제물포가 아닌 주안이나 부평 등으로 빠졌다. 한 청운대 학생은 “제물포는 이미 망해서 이용할 상점이 별로 없다. 자취를 하는 학생들도 거의가 부평이나 주안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말했다.

허전해진 거리와 풍경이 된 사람들 


청운대를 뒤로하고 석정로 202번 길을 따라 다시 제물포역 방향으로 향했다. 거리는 한산했다. 늦은 시간에 학교를 가는 몇몇 학생이 보였다. 상점들 중에서 영업을 하는 곳은 별로 없었다. 가게들은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았는지 유리문에 쌓인 먼지 때문에 안을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고, 그나마 문을 열고 있는 가게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5층 볼링장 건물의 1층에는 아직 영업을 하는 곳이 안경점, 피자가게가 전부였다.

 


제물포역을 지나 과거 분식집이 모여 있던 석정로 150번 길을 걸었다.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심각해 보였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떡볶이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고 라면가게 세 곳만 남아 있었다. 그 중 두 가게는 손님도 없이 TV만 틀어져 있었다. 문을 연 가게가 보여 반가움에 가까이 갔지만 내부는 안정기 제조업체로 바뀌어 있었다. 2009년 상반기만 해도 닭꼬치나 떡볶이 등을 먹으러 학생들이 몰려다니던 거리였다.

제물포 뒷역의 풍경은 쓸쓸했다. "학생 때는 자주 다녔는데. 이제는 찾는 사람도 없겠죠. 그냥 지나가다 생각나서 와봤어요.” 석정로 202번 길에서 만난 어느 인천대학교의 졸업생은 말했다. 이제 제물포 뒷역 거리를 찾는 사람은 이제 얼마 없다. 거리는 사람들이 찾을 때 거리로 존재한다.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거리는 계속해서 생겨나고 소멸된다. 하지만 소멸된 거리 위에도 사람들은 남아있다. 일평생을 거리에서 살며 풍경이 되어버린 사람들, 거리를 닮은 그들은 죽어버린 제물포 뒷역 거리에 아직 남아있다.


제물포상인연합회

동쪽 거리의 한 카페에서 제물포상인연합회를 만날 수 있었다. 제물포상인연합회는 올해 4월, 슬럼화와 공동화가 점점 가속화되는 제물포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지역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모임이다. 한 상인은 “송도를 살리려고 제물포를 죽였다”고 말했다. 인천대 이전으로 인한 제물포 상권의 몰락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2007년 3월 인천시는 제물포 역세권을 재정비 촉진 지구 지정했지만 2010년 2월 해제됐다. 현재 제물포 북부역 일대 상점가의 정확한 공실률은 집계되지 않았지만 약 50%에서 최대 80%까지로 예상된다. 인천시는 자구책으로 청운대 유치, 스마트타운과 행정타운 건설 등 자구책을 내놨지만, 당장 임대료를 내기에도 빠듯한 상인들에게는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다.

연합회의 회장 김충제(헤어클럽)씨는 가장 직접적인 제물포 상권의 활성화 방안으로 ▲경인선 급행열차의 정차, ▲청운대 스쿨버스의 제물포 정류, ▲PC방과 노래방 등의 설치 허가 등을 꼽았다. 청운대 학생들이 찾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의 동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급행열차가 제물포에 정차하지 않아 청운대 스쿨버스는 주안역에 정차한다. 때문에 주안역에서 스쿨버스를 타는 학생들은 제물포를 지날 일이 거의 없다. 또 제물포역이 학교정화구역에 해당해 기존에 있던 PC방 등 놀이 시설이 생길 수 없는 것도 학생들을 쫓아내는 요인 중 하나다.

인천시청

인천시는 제물포상인연합회가 제시한 방안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급행열차의 정차는 관련법상 이용객이 하루 평균 5만 명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지만 제물포역의 이용객은 2만여 명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했고, 또 PC방과 노래방의 설치에 대해서도 초중고가 가까이 있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제물포역 인근은 10여 개의 초중고가 인접한 학교정화구역이다. 이에 대해 제물포상인연합회의 한 상인은 “(PC방은 안되는데)당구장과 호프집은 된다”며 의아해했다.

제물포 북부역에 대한 인천시의 입장을 묻자 ‘원도심활성화 사업’과 ‘마을만들기지원센터’를 설립했다고 답했다. 원도심활성화 사업은 정비구역 해제지역과 노후 저층 주거지 등 18개 구역을 인천시에서 지원해 정비하는 것으로 주요 사업 내용은 길과 담장 정비, 공원 정비, CCTV설치 등이다. 또 마을만들기지원센터는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커뮤니티 구축과 공동체 문화 형성을 위한 기관으로 민간위탁방식이다.


4년이 지났다. 제물포 역세권 상점들은 인천대가 이전하기가 무섭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몰락이었고, 그렇기에 준비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인천시의 대비책이란 상인들이 버티고 기다리기에 지나치게 장기적이었다. 그나마도 난항을 겪으며 제물포 거리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기울었다. 인천시는 여전히 주민들에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장기 계획에 집중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청사진에 지금 거리 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인천시는 아직 제물포 뒷역의 거리와 그 위의 남은 사람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