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30대 중후반. 남자. 호남형의 외모. 무스 바름. 적극적. 말 많음.’
  ‘변호사. 40대 초반. 여자. 푸근한 인상. 파마머리. 수비적. 묵묵부답.’

‘나는 꼼수다’ 국민참여재판에 앞서 준비기일에 참석했을 때 취재 노트에 기록한 내용이다. 재판 당사자들도 참석하지 않은 준비기일에 간 건 국민참여재판의 화제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동생과 기자의 분쟁을 국민이 심판하는, 이 세기의 재판에 임하는 건, 변 측의 ‘전투력’을 가늠해보고 싶어서였다. 개인의 명예든 언론의 자유든, 어떤 사상이던지 간에 정의의 이름을 꿰차기 위해서는 결국 이겨야 하니까.

세기의 전장에 오르는 장수들을 살펴보았다. 최행관 검사는 의욕적이었다. 배심원단에 영향을 미칠만한 증거들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며 추가 채택을 변호사와 판사에게 요구했다. 이 증거는 물리고 저 증거는 낸다, 흥정하는 모습이 영업맨 같기도 했다. 고압적 태도를 유지하던 이건령 검사와는 달리 변호사 측에도 젠틀했다. 젠틀하게 법정에서 나꼼수 방송분을 듣자고 제의했다. 역시, 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이가 제일 무섭다. 이에 반해 이재정 변호사는 꼿꼿했다. 어떻게든 증거를 더 내놓으려는 검사와 달리 묵묵히 검사의 요구를 거부하기만 했다. 온갖 제의에도 ‘중립국’만을 외치는 ‘광장’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민변 출신 변호사인 만큼 소신이 느껴졌다. 검사와 변호사 둘 다, 만만치 않았다. 셌다.  


ⓒ 고함20 블루홀


10월 24일 공판 첫날, 전투는 시작됐다. 최 검사는 피카사라는 소프트웨어를 능숙하게 사용해 각종 재판 기록과 주 기자의 발언을 대조했다. 주 기자는 박용철이 이민영 육영재단 관계자에게 “박지만 회장 뜻”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신동욱 재판 기록에 따르면 박 씨는 “술 먹고 화나서 한 말이다,” “신동욱 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최 검사가 설정한 논리는 강력했다.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전제로 한 법정 증언에 반하는 보도를 했으니 당연히 허위사실. 변호사 측이 검사 측으로 기운 분위기를 뒤집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의 기록에 토를 단다니. 말 길어지면 변명이요, 목소리 높이면 이단인 우리나라 정서 상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둘째 날, 전세는 뒤집혔다. 재판 기록에 토를 달기 힘들다면? 이 변호사는 재판 기록 외 사건 정황을 제시해 '룰 브레이킹'을 시도했다. 목을 맨 자의 것이 아닌 시반, 목매단 밧줄 위에 놓인 두건 등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놓친 부분들이 주 기자가 의혹을 제기할 만했다고 주장했다. 주 기자의 보도에도 나오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논거의 홍수에 최 검사는 당황한 듯 했다. 최 검사의 주장을 정면 반박한 건 아니나 재판의 형식은 국민참여재판. 쏟아지는 정보는 판결의 키를 쥔 배심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 했다. 거기에 프레젠테이션의 활약이 얹혔다. 자료 중심이었던 피카사에 비해 이미지 중심의 프레지는 ‘승자 입장에서 역사가 기록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핵심 포인트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 고함20 블루홀


자정 남짓해 전투는 막을 내렸다. 평결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새벽 2시, 변호사 측에 승전보가 울렸다. 전 기소 내용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 평결에서의 유무죄 비율을 보면 변호사 측이 아슬아슬하게 이긴 부분도 있었다. 탄식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던 최 검사는 법정을 나갔고 이 변호사는 감격의 눈물을 삼켰다. 최 검사는 항소에서의 설욕을 구상하는 듯 했고 이 변호사 역시 아직은 눈물을 아껴야 할 때임을 알았을 것이다. 1심은 최종심까지 진행되는 전쟁의 서막뿐이니. 재판의 가치를 속단할 순 없지만 1심은 적어도 세기의 재판이라 할 만한 명승부였다. 최 검사의 프레임은 강력했고 이 변호사는 그 프레임을 여러 비기를 통해 깨트렸다. 

검, 변 측이 화려한 승부를 벌였지만 언론은 정작 전투보다도 지형만을 주목했다. 언론의 보도엔 ‘국민’만 있고 ‘재판’은 없었다. 실제 재판 내용은 다루지 않고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형식에만 치중했다. 전문가가 아닌 국민이 평결하면 감성적, 비상식적일 것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점은 재판의 쟁점, 즉 검, 변 측이 각론을 벌인 지점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획득한 정의인지 이렇게 무관심해서야 승소한다 한들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기나 할까. 이는 고개 숙인 최 검사든 득의양양하던 이 변호사든, 전장에서 피땀 흘린 장수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