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9일 파주출판도시에서 개관하는 ‘지혜의 숲’이 화제다. 50만권의 장서 수를 자랑하고 별다른 절차 없이 바로 책을 뽑아 읽을 수 있는 ‘완전 개가식’의 형태이며 365일 24시간 개방에 모든 장서가 기증되었다는 점 등 기존의 도서관과 다른 요소가 많아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실험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도서관이라고만 여기기에는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지혜의 숲’에는 사서가 없다. 대안으로 ‘권독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을 추천해주는 등 이용자들의 도서관 이용을 돕는 역할을 한다. 최근 ‘지혜의 숲’측은 권독사를 추가로 모집하며 ‘일 4시간 이상, 월 4회 이상, 3개월 이상 봉사가 가능해야 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 외의 권독사가 되기 위한 별다른 조건은 없다. 이들에게 사서의 전문적 업무를 기대할 순 없다. 도서목록조차 다 작성되지 않은 50만 권의 도서를 모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고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도서관을 적은 수의 자원봉사자가 모두 감당할 순 없다. 자원봉사자인 이상 이들은 애초에 도서관의 책임자가 아니다. 도서와 도서관 시설, 이용자 모두 그저 방치될 것이 뻔하다.

 

 

사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헤럴드경제

 

 


'지혜의 숲‘은 대출이 불가능하고 도서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지도 않으며 전부 기증도서만으로 운영되기에 언뜻 사서가 필요치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서는 도서관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대출/반납 업무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서는 도서의 수집, 분류, 보관 등의 업무를 수행할 뿐 아니라 도서관 내의 각종 행사를 주관하기도 한다. 대통령령으로 공공도서관이 반드시 최소 3명 이상의 사서를 채용하도록 할 만큼 도서관에서 사서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50만 권의 도서가 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서관에서 이를 담당하는 사서의 역할이 부재한 도서관이 제대로 운영될 리 만무하다.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의 김언호 이사장은 개관식 초대문에서 ‘지혜의 숲’의 가장 큰 목적으로 종이책의 보존․보호를 꼽았다. 그러나 이 도서관의 운영계획을 보면 이러한 목적을 수행한다고 보기엔 관리가 지나치게 허술하다. 권독사는 사서가 아니기에 도서관 관리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는 얘기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책이 도난당하는 상황이다. 기존 도서관의 장서에 붙어있는 도난방지태그도 ‘지혜의 숲’에선 찾아볼 수 없다. 또 이곳은 도서를 구매하지 않고 모든 장서를 기증받아 운영하기에 책이 없어질 경우 바로 보충하기도 어렵다. 심지어 도서관의 장서 수와 ‘권독사’의 수를 감안할 때, 책이 없어졌는지 다른 위치에 있는 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

 


이용자의 양심에만 맡기기에는 ‘지혜의 숲’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가 무겁다. 이 곳의 장서는 출판사와 개인의 기증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지혜의 숲’은 다른 도서관과 달리 십진분류법을 사용하지 않고 기증자별로 책을 구분해 비치한다. 해당 서가에 가는 것만으로도 출판사의 역사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헌책이라는 이유로 기존 도서관은 받지 않았던 개인 연구가들의 귀중한 연구자료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여분의 책이 많은 출판사는 차치하더라도, 개인 연구가의 책이 없어질 경우 같은 책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개인 기증자들은 자신이 평생토록 공부하고 아끼던 책들을 기부했다. 본인의 인생이 담겨있는 셈이다. 때문에 이토록 허술한 도서 관리는 기증자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처사이거니와 개인 연구가의 인생이 훼손되도록 방기하는 일이다. 개관 초기 많은 책이 없어지고 나서도 이용자의 ‘양심’에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책만 쌓아놓는다고 도서관이 되는 게 아니다. ‘지혜의 숲’은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며 새로운 형태의 도서관을 표방하지만, 살짝만 바꿔 생각하면 그저 예산부족의 결과로만 보인다. 책도 기증받고, 기증받은 책을 분류하지도 않고 관리도 안하며, 사서도 없다. 도서관의 사회적 역할, 교육․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비용과 정성이 아깝다면 아예 도서관을 개관하지 않는 게 낫다. 파주에 ‘책 무덤’이 등장할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