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입니다. '고함20'은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잠시 자판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문장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기자들은 각기 다른 손글씨로 각자의 문장을 써주었습니다. 이 문장들은 개인의 시간이 서린 문장들입니다. 누군가가 해 준 말이지만 이제는 나의 문장이 되어, 자꾸 머리 속에 맴도는 문장. 혹은 마음 속에 깊이 넣어두었다가 꺼내보는 문장입니다. 


소셜비디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한창 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뛰놀 때 이 책을 읽게 됐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였다. 그 누군가 때문에 많이 울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여지없이 돌아가겠다고 할 정도로 많이 좋아했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기 때문에 안심됐었다.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사랑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울고불고 했다가, 싱글벙글 웃기도 했다가 한다. 그래서 쉼 없이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반만 신뢰하고 싶다. 그래야 당신을 쉼 없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블루프린트 좋아하는 것과 나를 동일시 하는 것으로 사는동안 위안을 받았다. 그것이 내 현재라고 여겨질 때 좋았고, 그것이 내 미래의 형상이라고 생각되면 희망을 가질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내가 지킨다고 다짐했던 것들이 스스로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에 투영된 이상에 가까웠던 것 같다고 깨달아서 좌절했다. 기본도 안된 상태에서 쌓은 동경, 존경, 자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읽게 된 이 글은 나에게 명분이자 용기가 되었다. 그것은 대상에 내가 일방적으로 가 닿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유겐트슈틸 10대 때는 모든 게 분명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지금 생각하면 깊은 고민에서 우러나온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왜 해야 하는 지도 분명했다. 하지만 20대에 접어들면서는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이걸 하고 싶은 것이 맞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항상 망망대해에서 헤매는 느낌이다. 세상이 원하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 사이에 정말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할 때 이 말을 접했다.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상관없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모든 결정의 기준도 나여야 한다.





페르마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은 대학 2학년 때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참 좋아했어요. 뭐든 안된다 망할 거다 한발 뒤에서 궁시렁대는 쿨게이들이 싫은 이유와 저 멘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라는 단어가 자기계발서의 명령법이나 티아라의 관심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겠어요. 소히의 노래가사는 참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면서도 어렵지 않게 각자의 마음에 확 박히는 가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100%가 아니지만 100%인 척하면서 살아가잖아요. 널 믿는다고 말할 때, 널 좋아한다고 말할 때, 넌 틀렸다고 우길 때, 우린 잘 맞는다고 말할 때, 너와 난 같은 편이라고 이야기할 때, 내 미래는 잘 풀릴 거라고 말할 때, 난 자신 있다고 말할 때, 이게 내 길이 맞다고 얘기할 때, 날 믿는다고 말할 때.



아레오 내가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이 내게 알려준 것 가운데 하나는 "다시 보자"라는 말이 지닌 무력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는 여전히 그 말을 건네고픈 사람들이 있다. 부질없지만서도 고맙고 다행인 일이다.




소소한

2009년 대학 1학년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나의 옆에는 친구가 있었고, 술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외로움은 혼자이기 때문에 

찾아온다는 생각을 했고, 나에게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불현듯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를 우연한 계기로 접했다.

내가 수선화 인 듯 시인의 말은 내 가슴 속에 다가왔고,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괴기 어릴 적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좋아했던 곡. 외롭고 힘이들 때 내 인생에서 좌표가 돼준 곡이다.



은가비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에서 동급생 데이킨을 사랑한 유태인이자 성소수자인 포스너의 마지막 말이다. 극 중 포스너는 누가 봐도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이다. 그만큼 섬세한 감성을 가진 소년이기도 하다.  연극이지만 나 또한 그가 걱정되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포스너가 말한 말에 담긴 감성을 잊을 수 없다. 낙엽이 떨어지는 곳에 홀로 미소지으면 있는 소년이 떠오른달까.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포스너를 연기한 이재균을 좋아한다. 이재균 화이팅 멋져요. 다음 연극도 응원해요.        




릴리슈슈 생일이었다. 그 날만큼은 상투적이더라도 좋길 바랬다. 환상이었다. 뭐, 그런 셈이다. 그런 날. 저 문장이 내 앞으로 굴러들어왔다. 독서를 마친 나는 허한 마음에 한참을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생각인지 후회인지 징징거림인지, 그런 잡다한 류의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진 것도 없는 내가, 그리 높이 있지도 않은 내가 무엇이 두려워서 가졌다고 생각했던 걸 버리지 못했는지. 다시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왜 노력했는지. 나의 소심함이 수치스러운 나는, 종종 이 문장을 읽으면서, 그 날을, 저 구절에서 나온 그때의 감각과 결심을 다시 살려낸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점차 악화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버리고 타락하고 부수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또다시 머리속에 꾹꾹 새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