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엄빠주의](엄마아빠 주의라는 뜻으로 보통 19금 자료를 미리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라는 말머리를 달고 있는 한 게시물을 보았다. 메신저를 통해 친구들에게 네이버에 ‘세상의 기원’이라는 단어로 검색해 보라고 이야기 하고, 그 반응들을 갈무리해놓은 게시물이었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세상의 기원’이라는 단어를 잽싸게 네이버에 검색했을 때 나온 것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었다. 
 

좌측 :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우측 : 쿠르베의 <루에의 동굴>

이 그림은 매우 해석이 분분하다. 쿠르베가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사실주의를 완성하는데 이러한 파격적인 소재가 효과적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어떠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남성의 감상을 위해 그려진 ‘보여지기 위한 여체’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후자는 명백한 오해이다. <세상의 근원>에서 드러나는 여체는 자연과도 같다. 여성의 몸은 세상을 낳은 위대한 것이다. 실제로 쿠르베는 여성의 누드를 보면서 영감을 받아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쿠르베의 작품 <루에의 동굴>과 <세상의 근원>은 놀랄 정도로 유사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쿠르베의 작품들은 여성주의적 작품인가? 참고로 쿠르베는 남성이다.

여성주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여성주의 예술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쉽게 나올만한 의견이 몇 가지가 있다. 여성을 다룬 작품, 여성이 그린 작품, 여성적인 작품,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 정도가 되겠다. 근대의 대부분의 정의가 그렇지만,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정의도 열려있다. 니체가 개념들을 정의하듯, 여성주의자들도 “여성주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여성주의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여성주의 예술을 정의하였다.

이러한 반 본질적인 태도로 정의하게 되면, 한 남성작가가 그린 그림. 예를 들면 신윤복의 그림은 여성주의 예술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여성작가가 그린 그림조차도 여성주의 예술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피노의 비너스>를 보자. 이 그림은 여성을 주제로 다루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여성주의 그림인가? 그렇다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마네의 <올랭피아>

   위 : 마네의 <올랭피아>, 아래 <우르피노의 비너스>

마네의 이 그림은, 여성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생각 할 수 있도록 그려진 최초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당시 무척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신성화 되지 않은 여체를 그림으로 마주하는 것은 대중들에게는 처음이었다. 게다가<우르피노의 비너스>를 노골적으로 패러디 한 것이었기에, 신성성과의 대비는 더욱 더 극명했다. 그려진 대상은 창녀였고, 완벽하지 못하고 얼룩진 몸에, 발에 걸친 슬리퍼와 목에 묶은 끈과 팔찌는 너무나 천박했다. 그림 속의 모든 알레고리가 이 여성은 음탕한 창녀라고 외치고 있다.

게다가 어리지만 겉늙어 보이는 이 여성은 관람객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당시 파리의 밤 문화는 화려했지만, 감추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은밀한 밤 문화가 전면에 드러난 것을 항의하던 남성들은 이 한 창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책망하는 듯하기도 하고 의지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 이 여성의 눈길. 그림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간 남성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성적 욕망의 대상인 여성들에 대하여. 완전히 드러난 여체에 대하여. 자신들의 밤에 대하여.

유디트의 두 가지 모습

왼쪽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서의 목을 베는 유디트>
오른쪽 : 카라바조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역사적으로 여류화가들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예술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배제되어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여성성이 강조된 정물화들 속에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들은 확연히 뛰어나다.

왼쪽 그림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서의 목을 베는 유디트>이다. 전체적으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면, 오른쪽의 카라바조 그림을 본 것일 것이다. 아마 카라바조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목을 베는 장면이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여자의 고정적 여성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자세만 놓고 보면, 사람의 목을 썰고 있는 것인지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것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가녀린 여체와, 소심해 보이고 수동적이어 보이는 신체의 자세, 그리고 피를 징그러워하는 표정의 ‘카라바조표 유디트’와 대조적으로 젠틸레스키의 그림의 유디트는 거리낌이 없다. 근육질의 남성적 몸매의 유디트는 역동적이고 위협적이다. 같은 제재와 기법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모습의 여성을 그려낸 이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의 그림을 이런 식으로 변형 하면서 느꼈을 그녀의 조소와 희열이 느껴진다.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몇 년 전에 서점에서 책 이름에 끌려 잠시 펼쳤던 책이 있다. 제목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였다. 한권 모두 책을 읽는 여자들을 주제로 한 작품들만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양이 매우 많았다. 책을 읽는 여성들의 표정에는 남자의 그것에서 읽을 수 없는 의지적이고, 앎의 기쁨을 느끼는 듯한 표정들이 담겨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유는 남성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남성은 책을 읽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성에게 책을 읽는 것은 분명 새로운 기쁨이었을 것이었고 이러한 여성의 생각하는 표정은 시사점이 있었기에 수많은 화가들의 시선을 이끈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작품은 우측에 보이는 이브 아널드의 <마릴린 먼로가 율리시즈를 읽다>라는 사진작품이었다. 마릴린 먼로 하면 남성의 시각에 맞게 대상화된 섹스 심벌인데 명작인 <율리시즈>를 읽고 있다. 제목도 무언가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듯 중요한 사건인 양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아름답거나 섹시한 여자가 생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블론드는, 혹은 가슴이 큰 여자는 무식하다는 속설이 이런 생각을 반영한다. 이러한 아름답고 섹시함의 표상인 마릴린 먼로가, 세기의 고전 <율리시즈>를 읽는 그 순간, 아마도 세상은 꽤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이름이 존재하지만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들, 주디 시카고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 중 일부

지금까지 이야기 했더 작품들은, 실제 여성주의 운동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들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공통감이 바뀌어가는 시대 변화를 담아낸 작품들이었다.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한 작업으로는 바바라 크루거와 신디 셔먼 등이 매우 유의미한 결과들을 만들어 냈지만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디 시카고는 주로 자궁 도상과 여성의 성기를 그려왔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다 보니 해리포터가 생각난다. 볼드모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라고만 부르는 이들에게 덤블도어는 이야기한다.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고 숨기는 것이 공포심과 왜곡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역시 여체, 여성의 성기에 대해 왜곡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남성의 성기를 칭하는 말들은 귀여운 것이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여성의 성기를 부르는 명칭들은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다. 남성은 자신의 성기에 대해, 혹은 다른 남성의 성기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주디 시카고는 그러한 여체를 전면에 내세워 왜곡된 감정을 없애고 여성의 몸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녀의 대표작품 <디너파티>는 유명 여성들의 이름이 새겨진 식탁보 위에, 성기를 본딴 그릇을 올려놓아 이 모든 여성들이 성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여성 성기를 더욱 일상적이고 친근한 범위로 가져다 놓으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