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오후 1시, 시청사 앞 서울광장에서는 제 1회 ‘멍때리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의 기획과 황원준 신경정신과의원의 자문으로 개최됐다. 대회의 개최소식이 알려지면서 멍때리기대회와 관련된 소식은 인터넷 상에서 연일 화제가 됐다. 기자는 멍때리기대회의 현장이 궁금했다. 주최 측에 문의한 결과 참가자 중 20대가 가장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회에 참가한 20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기자는 멍때리기 대회의 현장으로 출발했다.
PM 12:30 –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기자가 대회장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경. 시청역에서 서울광장 방면으로 나오자 멍때리기 대회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본격적인 대회 시작시간을 30분 앞두고 도착한 현장에는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도착해 착석해 있었다. 여러 언론사들도 카메라의 위치를 확보하며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대회의 풍경을 돌아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마침 점심시간을 맞이한 직장인들은 대회의 풍경이 신기한 듯, 가던 길에 멈춰서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다. SNS 등을 통해 멍때리기 대회가 어떤 대회인지 알고 있었던 시민들은, 멍때리기 대회가 뭔지 궁금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회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부분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다는 반응이지만, 진작 소식을 알았더라면 자신도 참여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멍때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 규모는 50여 명. 아직까지 선수 입장이 진행중이다. 선수들은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대회에 필요한 간단한 물품을 받은 뒤 대회장으로 입장한다. 대회석은 서울광장 잔디밭 위에 마련되어 있는 요가매트다. 계속 입장이 진행되면서 선수들은 속속 빈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 때마침 학교 야구잠바를 입고 입장하는 선수 한 명이 기자의 눈에 띤다. 대회 시작시간인 1시 전까지는 대회장 출입이 자유롭다는 얘기를 들은 기자는 인터뷰를 위해 요가매트 사이를 가로지른다. 전체 참가자 중에서 학교 야구잠바를 입고 참석한 두 명의 여대생을 만났다.
고함20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주원 : 21살 대학생이고, 오주원입니다.
경은 : 22살이고 심경은이예요.
고함20 : 대회에 참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주원 : 앞으로 먹고 살 생각하면 걱정되고 머리가 아파서 자주 멍때리게 되는 것 같아요. 평소에 자주 멍때리니까 대회에 나가서도 무난하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경은 : 제 별명이 고라파덕이예요. 평소에 멍때린다는 얘기를 자주 듣기 때문에 SNS에서 대회가 열린다고 하는 걸 보고 당연히 참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함20 : 주변에서는 참가하는 걸 알고 있나요?
주원 : 네. 주변에서는 수업시간에 하던 것처럼 하면 나가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경은 : 얼마 전에 휴학을 하게 돼서 많이는 못 알렸어요. 지인들은 몇몇만 알고 있는데, 대회가 알려졌을 때 나가면 좋겠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PM 1:00 - 우리에게 멍때리기를 허하라
오후 1시가 되자 대회가 시작된다. 진행은 역시 남달랐다. 여느 행사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여 육성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둘둘 말려있는 얇은 천을 풀자 그 안에는 진행 멘트가 쓰여 있다. 대회가 광장이라는 넓은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현명하면서도 대회의 성격에 걸맞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울려퍼지는 소리를 듣도록 함으로써 감각을 분산시키고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보도록 함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키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참가자 전원은 월선 김용필선생의 기체조 시범을 따라하며 몸을 푼다. 기체조가 끝나자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된다. 참가자는 9세 어린이에서부터 50대 아저씨까지 다양한데,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멍때리기에 충실하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참가자들은 가만히 앉아 멍때리기에 여념이 없는 반면, 행사 진행요원들의 움직임은 바빠진다. 의사 가운을 입은 진행요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참가자들의 심박수를 잰다. 대회 심사요소에 심박수도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멍때리는 시간이 길다고 해도 심박수의 변동폭이 좁은 사람이 승리한다. 여기에 대회를 구경하는 시민들의 인기투표 결과가 더해져 최종 우승자가 결정된다.
PM 1:30 - 멍때리기, 쉽지만은 않아요
대회가 열리는 27일의 날씨는 그야말로 ‘가을날’이었다. 보기만해도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청명한 하늘이지만 내리쬐는 햇볕은 따뜻하면서도 따갑다. 날씨 탓인지 대회 시작 30분만에 부표를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참가자가 속속 생겨난다. 참가자가 들 수 있는 부표는 세 가지다. 빨간색은 자세를 크게 바꿀 수 없는 참가자들이 안마를 해달라는 표시이고, 노란색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신호이다. 파란색 부표는 강력한 태양아래 그늘도 없이 오랜 시간 앉아있어야 하는 참가자들이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표시이다.
참가자가 부표를 들면 의사가운을 입은 진행요원이 참가자의 요청에 따른 조치를 해준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도움을 받는 것만은 아니다. 진행요원은 “저희는 일종의 방해꾼들이예요. 그래서 일부러 옷도 섹시한 컨셉으로 입고,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참가자들의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역할도 해요”라며 자신의 역할을 귀띔해 준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하는 참가자들에게 자극거리를 던져주면서 방해공작을 펼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나니 진행요원이 왜 의사가운에 망사스타킹을 신었는지 알 것 같다.
1시 40분을 넘어서자 한 참가자가 짐을 싸들고 나와 흰색 깃발을 세 번 흔들어 ‘기권’을 표한다. 첫 기권자가 나온 것이다. 첫 기권자는 보험영업직에 종사하는 36세 여성으로, “영업직인데 전화기를 꺼놔서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계속 생각이 난다”며 기권이유를 밝혔다. 휴가를 받아 참가한 멍때리기 대회에서였지만, 머릿속에서 업무에 대한 생각을 잠시라도 비워내기란 힘든 모양이다.
1시 50분이 지나면서는 첫 탈락자가 발생한다. 탈락자는 주최측에 의해 질질 끌려나오게 된다. 첫 탈락자는 군복을 입고 참가한 이지현(23,남성)씨. 지현씨와 얘기를 나눠봤다.
고함20 : 탈락을 하셨는데, 왜 탈락하신 것 같아요?
지현 : 멍때린다는 게 아무것도 안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계속 뭔가 만지작거리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떨어지지 않았나......
고함20 :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요?
지현 : 일찍 탈락하긴 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쉬는 거니까요. 대회 취지도 쉬는 거였고. 그래도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쉬운 것 같지 않아요.
고함20 : 대회에서 요구하는 멍때리기와 본인이 생각하는 멍때리기가 다른 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지현 : 대회에서는 아무래도 객관적인 기준을 내야 하니까, 마음보다는 심박수 같은 신체적인 것들이나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멍때릴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멍때리기만 해야되니까요.
PM 2:00 - 멍때리기대회, 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시가 넘어서면서 또 한 명의 탈락자가 발생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고 있는 25번 참가자(24, 남성)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탈락 이유에 대해서 “잠시 누워있었던 것인데 자는 걸로 오해받은 것 같다”고 밝혔다. 이 참가자는 일상 속에서 멍때리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자신의 미래와 진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이 많아지면서 멍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번째 탈락자가 발생하면서 대회는 구경하는 재미도 더해간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대회 모습을 구경하거나, 대부분 멍때리기 대회라는 이색적인 풍경을 신기하고 재밌게 바라본다. 하지만 한 노부부는 “젊은 사람들이 왜 귀중한 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고 저렇게 멍청하니 앉아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기체조 시범을 보였던 김용필선생이 노부부의 옆으로 다가가 행사의 취지를 설명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지나가던 노인들도 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게 뭐 하는 대회냐"며 계속해서 궁금증을 드러낸다.
시간을 내서 대회를 지켜볼 수 없는 시민들은 투표를 한다. 시민이 각 참가자의 멍때리는 자세나 표정 등을 평가하여, 마음에 드는 참가자에게 스티커를 붙여주는 방식이다. 대회가 시작되고부터 투표 열기도 뜨겁다.
PM 2:30 - 멍때리기대회가 남긴 것들
2시 30분. 대회 종료가 선언된다. 몇몇 기권자와 탈락자를 제외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회가 종료될 때까지 1시간 30분 동안 멍때리기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모두 수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박수와 시민투표 결과를 조합한 결과가 우수한 사람만이 수상자가 된다.
몇 분이 지나고 수상자가 발표된다. 1위, 2위, 3위는 심박수와 시민투표 결과를 조합하여 성적이 우수한 수상자이고, 시민투표 결과 표를 많이 얻지 못했지만 심박수 그래프가 뛰어난 참가자는 아차상을 수상한다. 1등을 차지한 수상자는 9살 어린이여서 눈길을 끈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이 대회의 기획자인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electronic ship)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기호의 ‘웁쓰양’은 “우리가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몸이 고기를 원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수시로 멍을 때린다는 것은 뇌가 쉬고 싶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웁쓰양은 멍때리기가 우리 몸에 필요한 작용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멍때린다는 게 사회적으로 쓸데없고 시간 낭비라고 여겨지는 점을 지적했다. 대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요즘 사회에서 멍때리기가 과연 뭘까 고민하다가,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쟁구도를 가져와 ‘대회’라는 걸 만들었다”고 답했다.
AFTER PM 2:30, 멍때리기대회가 끝나고
멍때리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니 멍을 때리는 행위는 주체적이다. 멍때리는 게 내 의지를 배제하고 완전히 수동적이라면 굳이 ‘때린다’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멍하다’고 했을 것 같다. 멍때리기는 휴식을 원하는 뇌의 요구에 반응한, 내 몸의 주체적 휴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기자의 머리에 스친다. 참가자들이 유독 “오늘이 월요일인데 이 요일에, 그리고 이 시간에 잔디밭에 앉아서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는 말을 많이 한 까닭을 알 것 같다. 참가자들은 오늘 하루의 가장 뜨거운 시간에 가장 뜨겁게 휴식을 취한 사람들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 마침 빈 자리가 많다. 기자도 오늘만은 스마트폰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이제껏 아무 것이라도 생각하도록 훈련받아온 탓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멍하니 있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월요일 오후의 휴식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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