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장비 없이 한 무리의 남자들이 ‘타잔’처럼 건물 옥상을 훌쩍 건너뛰고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기어 오른다. 도심 속에서 펼쳐지는 이 맨몸 액션은 바로 프랑스에서 유래한 신체훈련법 ‘파쿠르’다. 파쿠르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10년 전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1세대 파쿠르 트레이서 김지호 씨(26). 지난 12월 초에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 IT기업 아루바네트웍스의 콘퍼런스에서 파쿠르 공연 참여로 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드디어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경쟁에 지친 소년, 파쿠르를 만나다


2004년, 우울증과 게임중독을 겪던 지호 씨는 당시 친구의 권유로 영화 <야마카시>를 보고 파쿠르를 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선뜻 파쿠르에 흥미를 느낀 것은 아니다.


“소심한 성격이었던 터라 처음엔 파쿠르를 하는 것이 사회의 프레임에서 이탈하는 것 같아서 겁이 났어요. 하지만 처음으로 학교 운동장의 담을 뛰어넘었던 날, 그런 두려움을 뛰어넘는 성취감을 느꼈죠.”

 

 

ⓒ 아웃도어뉴스


 

지호 씨는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파쿠르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파쿠르가 야마카시라고 잘못 알려졌을 정도로 제대로 된 정보나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파쿠르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던 것은 파쿠르의 ‘이타주의’ 철학 덕분이었다. 제대로 파쿠르를 배운 사람 하나 없었지만 파쿠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가르쳐주고 실력을 키워나갔다. 점프를 잘 뛰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을 이끌어주는 식으로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게 서로 도우는 식이었다.

 

“파쿠르를 하면서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만큼 경쟁이 심한 나라가 없더라고요. 한국 사회의 무한경쟁은 엘리트만 남기는 승자독식 구조잖아요. 학교에만 가 봐도 상위권 학생들은 점점 더 잘하고, 하위권은 점점 더 뒤처지죠. 하지만 파쿠르에서 경쟁은 오히려 독이에요. 상대를 누르려고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무리해서 덤비면 다치기만 할 뿐이거든요.”



옥상 뛰어넘기보다 힘든 기성세대 편견 뛰어넘기


파쿠르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파쿠르에 대한 기성세대의 왜곡된 시선이었어요. 무조건 위험한 운동 혹은 도둑질 운동이라는 사회의 편견을 견뎌내야 했죠.”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벽넘기 연습하다가 도둑으로 오해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는 “부모님조차 위험한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말리셨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한다는 점이 동기부여가 됐어요”라고 말했다. 

 

파쿠르를 하다가 혹시 다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지호 씨는 고개를 저었다. “간단한 찰과상 정도는 있었죠. 하지만 크게 다친 적은 없어요. 처음부터 고난도의 동작을 도전하지 않고 점차 자신의 한계를 높여나가면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다만 파쿠르는 다른 운동과 달리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할 뿐이죠. 축구처럼 경쟁하는 운동이 아니라 요가처럼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법으로 생각하면 돼요.”



내가 내 삶의 결정권자일 때 행복할 수 있어


 ⓒ 파쿠르제너레이션즈 코리아


숭실대학교 벤처중소기업학과를 졸업한 지호씨는 한 때 취업과 창업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다.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땐 취업을 하고 파쿠르는 취미로만 하자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파쿠르를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었죠. 비록 실패하더라도 원하는 길을 선택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거.”


지호 씨는 현재 파쿠르제너레이션즈 코리아 지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파쿠르제너레이션즈는 2006년 세계 최초로 설립된 파쿠르 교육단체다. 그는 한국에서도 올바른 파쿠르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지난 2013년에 한국 지사를 설립했다. 파쿠르 전용 신발·의류 판매, 아카데미 운영 및 워크샵 개최, 각종 CF 및 방송 출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그 중에도 교육 사업에 가장 집중하고 있다. "아무리 방송에 출연해 올바른 파쿠르 철학을 알리려 해도 체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계 유일의 파쿠르 공인 자격증 ADAPT Level2를 딴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최근에는 중고등학교에서 방과후수업으로 파쿠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파쿠르 수강생의 주 연령층이 10대 남성이다 보니 학생들이 학교에 파쿠르 수업을 요청해 방과후수업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국내 최대 파쿠르 커뮤니티 ‘한국 프리러닝&파쿠르 협회’의 운영도 맡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같은 20대에게 파쿠르를 통해 배운 행복론을 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해요. 운동장 담을 처음 넘기 전의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냐 포기하는 것은 환상이에요. 저도 파쿠르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모두 견뎌내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깐 행복해지더라고요. 일단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