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는 농노와 장원, 그리고 기사도로 대표된다. ‘기사와 왕’ 이라는 힘의 논리와 ‘농노와 장원’ 이라는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중세 봉건 사회에서 태어나 더 높은 작위를 얻고 더 큰 장원을 지배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조선 시대는 어떠한가? 조선 땅에 태어나 청운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과거 시험에 목숨을 걸고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는 것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중세 유럽, 조선 시대와 오늘날이 다른 것이 있다. 그 때는 적어도 인문학이 상식인 시대였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꿈인 시대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위’, ‘청운의 뜻’을 대신할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말은 사회를 유지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돈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심지어 사회적으로 각 개인들에 강요되는 측면을 가진다. 물론 이는 경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더 확 와 닿는 단어는 돈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힘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다. 또한 한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경제가 기사도나 사농공상과 같이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다시피 우리 사회는 뭔가 한 가지 부족하다.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성찰하는 ‘인문학’이 제 힘을 못 쓰고 있다. 인문학이 인간에 대해 탐구하기 위한 당연한 상식이 아니라 고상하고 꿈같은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주의 역사학자 박노자는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지금 자본과 국가가 인문학의 목을 졸라 질식사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국가가 생산한 인문학은 자본과 국가의 공격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필요에 맞추어 발달한 대한민국의 현대 인문학은 따라서 역시 자본주의의 필요에 의해 도태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인문학 위기가 심각한 이유

지난 달, 2학기 공채 모집이 한창인 서울 시내 4년제 대학 국문과의 수업시간. S전자에 입사한 선배가 들어와서 수업이 15분 일찍 끝났다. 모두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입사와 관련한 비화를 무용담처럼 말하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그 시간에 영국 시인에 대한 이야기 몇 마디 못했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삐딱하게 말했지만 이들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배가, 또 제자들이 조금이라도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선후배, 사제 관계가 소원해진 요즘 대학에서는 따뜻한 광경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교수가 자기 수업 시간을 포기할 만큼, 선배가 후배들의 일탈을 장려 할 만큼 이미 인문학은 그 힘을 잃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어차피 인문학만 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인문학의 위기만큼 이공계 위기도 커다란 문제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이공계의 위기는 국가적으로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지만 인문학은 지금과 같은 사회 구조에서는 아예 쓸모가 없다는 것. 다시 말 해 신자유주의적 국가 과제가 기업을 위한 ‘좋은 상품’을 조달(무차별한 민영화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미명 하에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하는 것이다 보니 ‘인문학이 도태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는 피조물. 정신의 옳은 발달 없이 기술만 앞서 나간 기이한 신체.
뛰어난 신체와 지적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를 담을 정신적 그릇이 존재하지 않아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문학의 도태는 그렇게 쿨하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공계의 위기나, 일자리 부족과 같은 이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사회를 움직이는 철학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부재는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가져올 수 있다.

영문학사의 걸작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야심찬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는 인륜을 거스른 연구로 괴물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괴물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비극을 친구 ‘헨리 클레발’이 바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헨리 클레발’은 문학을 즐기고 철학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기술과 야망의 광기로 점점 엇나가는 프랑켄슈타인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삐 풀린 말처럼 달려 나가는 경제 논리의 폐해와 기술 발전의 어두운 면을 누가 제어할 수 있을까?

인문학이 지식이 아닌 ‘가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