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연재/다이어리 관음기 (6)

[다이어리 관음기] 6화 종종거리는 M의 총총 다이어리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목소리, 손짓, 걸음걸이 같은 것. M을 처음 기억하게 한 것은 단연 그의 손짓이었다. 무어라 종알대다가 누군가 톡 쏘아붙이면 M은 금세 양 검지 손가락을 빠르게 부딪히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았다. M을 어떻게 수식해야 할까, 간단없이 고민하다가 ‘종종’이라거나 ‘총총’이라는 말이 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부산스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까치가 겅중겅중 걸어 다니는 모양새가 떠올랐다. 바지런하게 주변을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뛰는 감파른 까치가. 동사 종종거리다1. 발걸음을 가까이 자주 떼며 계속 빨리 걷다.2. 원망하듯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군소리로 자꾸 종알거리다. 부사 총총1. 편지글에서, 끝맺음의 뜻..

[다이어리 관음기] 5화 십 구문 반의 신발, S 다이어리

[다이어리 관음기] 5화 십 구문 반의 신발, S 다이어리 “내 신발은 / 십 구문 반 /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 우리 막내둥아.” 박목월의 시 ‘가정’에는 십 구문 반의 신발을 신는 가부장과 육문 삼 신발의 주인인 막내가 등장한다. 처음 만난 날 S는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신발을 신는 막내둥이 같았다. 입을 열 적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 젖히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리고 겨울에서 여름까지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단언컨대 S는 십 구문 반의 신발을 신는 가부장의 모습에 수렴하고 있다. 입을 열 적마다 껄껄 웃어 제끼는 S의 다이어리를 관음해보았다. 다이어리를 소개해달라.작년 12월 말부터 써온 스케줄러 겸 다이어리다. 평범하다. 먼슬..

[다이어리 관음기] 4화 그 무엇도 아닌 사소한 자존, K의 낙서장

[다이어리 관음기] 4화 그 무엇도 아닌 사소한 자존, K의 낙서장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 아닌 유행을 타기 시작한 후로 나의 자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나더러 ‘자존감 폭주 기관차’라 불렀다. 나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작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시선의 사슬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 모를 술자리에서 몇몇 이들이 라캉이니 들뢰즈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멀뚱대기만 할 뿐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라캉도 들뢰즈도 얼핏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때 그 자리에서 자괴감 비..

[다이어리 관음기] 3화 ‘인생은 되는대로’ 혁명가 X씨의 일일

[다이어리 관음기] 3화 ‘인생은 되는대로’ 혁명가 X씨의 일일 나는 스물세 살, 휴학하지 않았다면 벌써 졸업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달갑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질문의 빈칸을 채워야 한다. 공강 시간 동아리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배달 음식을 앞에 두고 나무젓가락을 두 개로 짝 가르는 순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소리 내며 들이키는 순간에도 불현듯 물음표를 토해낸다. “아, 나 진짜 뭐 먹고 살지?” X는 나의 공허한 질문에 가장 혁명적으로 대답했던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는 말을 던지듯이. "X, 뭐 먹고살 거야?”"아르바이트하면서 글 쓰고 살 거야.”"아르바이트? 그렇게 살면 여러모로 힘들 것 같은데.”"정 힘들면, 죽지 뭐.” 그렇다. 정 힘들면 죽으면 된..

[다이어리 관음기] 2화 말끔한 E의 깔끔한 2주 천하

[다이어리 관음기] 2화 말끔한 E의 깔끔한 2주 천하 2화를 맞아 숫자 2에 어울리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았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내게 친한 친구가 두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이미 1화에 등장했다.) E는 학업에 대한 열의로 활활 불타는 대학생이다. 나는 종종 E를 ‘내추럴본 샌님’이라 놀리곤 했다. 어깨너머로 들여다본 E의 다이어리에는 샌님의 스테레오타입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글씨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얼핏 보아도 다이어리에 대한 취향은 E를 똑 빼닮았고, 나름의 체계랄 것까지 있어 보였다. 이토록 좋은 인터뷰 소재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 다이어리를 좀 관음해도 될까”하고 요청하자마자 E는 곤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털어놓은 E의 한 마디는, “사실 2주밖에 안 썼..

[다이어리 관음기] 1화 실없는 Y의 고급진 다이어리

[다이어리 관음기] 1화 실없는 Y의 고급진 다이어리*여기에서 다이어리란 단순히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날짜별로 간단히 글(일정, 감상)을 쓸 수 있는 수첩을 말한다. 다이어리 쓰는 것, 아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이어리를 썼던 이유는 내가 쓴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할 정도다. 과거형이라는 것을 눈치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못 써서다. 쓴 걸 볼 때마다 괜히 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남의 다이어리를 보기 시작했다. 자기 다이어리를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딱히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질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맨 마지막 부류의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다이어리를 구경해도 되겠느냐고 공손히 묻는다. 나는 다이어리를 오래 쓴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