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관음기] 3화 ‘인생은 되는대로’ 혁명가 X씨의 일일


나는 스물세 살, 휴학하지 않았다면 벌써 졸업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달갑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질문의 빈칸을 채워야 한다. 공강 시간 동아리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배달 음식을 앞에 두고 나무젓가락을 두 개로 짝 가르는 순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소리 내며 들이키는 순간에도 불현듯 물음표를 토해낸다. “아, 나 진짜 뭐 먹고 살지?”


X는 나의 공허한 질문에 가장 혁명적으로 대답했던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는 말을 던지듯이.


"X, 뭐 먹고살 거야?”

"아르바이트하면서 글 쓰고 살 거야.”

"아르바이트? 그렇게 살면 여러모로 힘들 것 같은데.”

"정 힘들면, 죽지 뭐.”


그렇다. 정 힘들면 죽으면 된다. 삶의 선택지에 ‘죽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 얼마나 섹시한 선택지인가. 나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었던 종류의 대답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혁명가 X를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이것은 나의 사사로운 욕망이 가득 담긴 친분 쌓기용 인터뷰에 다름 아니다.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다.

귀엽지 않은가. 공짜로 받았다. 중앙광장에 새로 생긴 문구점에서 얼마 이상 샀더니 나눠주었다. 다이어리와 별로 친하지는 않아서 딱히 소개할 것은 없다. 매일 들고는 다닌다. 가벼우니까.



보통 다이어리는 새해에 심기일전해서 사지 않나?

본래는 연초에 사서 3월, 4월쯤 되면 폐기하는 인간형이다. 그때쯤 되면 연초에 계획한 다짐들이 모두 힘을 잃고 물거품이 되니까.


1월에는 집에 가 있느라 못 샀고 2월에는 문구점에서 주길래 따로 안 샀다. 그저 굴러 들어온 것을 쓰고 있다. 아마 다이어리를 안 받았으면 안 썼을지도 모른다. 다이어리를 고르는 데 있어 딱히 까다롭지 않다.


다이어리의 용도는 무엇인가?

일정을 관리하는 정도다. 규칙도 없다. 그냥 메모가 필요하면 펼쳐 쓴다. 중요한 게 얼마 없으니 다 봐도 상관없다. 일기장은 따로 쓰니까.






첫 장에 쓰인 것은 무엇인가? 자못 심오해 보인다.

2015년 나의 계획이다. 나는 단기적인 목표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이나 삶의 방향이 ‘단기적인 목표’를 요청하지 않는다.


써놓긴 했지만 뭐 이것조차도 딱히 ‘나의 꿈’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박아놓고 싶지는 않다.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말고. 조금 더 부연하자면 어떤 매체로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건 그 매체가 ‘글’이었으면 했을 때 썼다.


대학생인 것으로 아는데 단기적인 목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니, 이색적인 지침이다.

그래도 커다란 줄기는 정해진 편이다. ‘취직하지 않겠다’는 것. 이전부터 오래 고민해왔던 문제다. 일단 나 자체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야망이나 욕구를 아주 느끼지는 않는다.


고등학생 때는 자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만을 착실히 하는 편이었다. 그때 같이 다니던 친구 셋 중 하나가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그 친구가 평소 실력대로 수능 시험을 보고 난 후 펑펑 우는 모습을 봤다. 그때 느낀 바가 있었다.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이 구조 속에서 내가 이 친구를 밟고 일어서 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이 친구를 울게 만들어야 하나, 그런 거?


그렇군. 최초로 말이 길었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가?

그렇다. 이런 나를 상대로 인터뷰하게 하다니 미안하다. 사실 지금은 말이 많아진 편이다. 이전에는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3년은 정말 계속 그랬고,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조금 달라졌다. 아무래도 애들끼리 모여 있다 보니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계속 나의 일상을 물어봐 주는 사람도 있었고, 오래 있다 보니 친해지기도 해서 말문이 좀 트였다.


당신의 침묵에는 의도성이 조금도 없나?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타고나기를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초등학생 때는 말이 많았지만 어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렇게 됐다. 그 개인적인 사정을 자각하게 된 건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반추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자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후로 말이 없게 됐구나’하는 것을 알게 됐다.


심오한 대답이다. 물어도 답해줄 것 같지 않으니 그 ‘개인적인 사정’은 ‘개인적인 것’으로 남겨두겠다. 말이 없으니 생각이 많은 편일 것 같다.

남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비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남들이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 수는 없으니까...




알겠다. 다이어리를 다시 펼쳐보자. 먼슬리에 공부하는 내용밖에 없다.

일정 정리하는 용도가 주되니까 그렇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안 적을 뿐이다. 여기 쓴 것 중에 지킨 것이 몇 개 없다는 게 문제지만.


3월 먼슬리 한편에 ‘열심히 살자 제발’이라고 쓰여 있다.

학기 초의 다짐이다. 태생적으로 하도 게으른 인간이라 좀 바뀌어보자 싶어서 적었다. 효과는 없었다.


5월, 다이어리가 현저히 기력을 잃고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열심히 살자는 의지가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3월에 세운 삶의 목표를 버리니 더욱 편하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해야 하는 것도 없고, 덕분에 지금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물론 게으름과 성실함의 간극을 조율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요즈음의 일상에 만족하는 편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불안감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런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원래 느긋한 성격이다. 일부러 노력해서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법을 물어도 답해줄 수 없다.


한편 위클리는 아주 자유롭다.

잘 안 쓰는 공책이라고 보면 된다. 요일 구분 그런 것도 없다. 막 쓴다. 해야 할 일을 나열하기도 하고 떠오른 생각을 구체화할 때도 쓴다.


아, 그런데 기사를 부지런한 사람처럼 적어주면 안 되는가?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은 없지만 너무 한가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오해할까봐 그런다. 나도 나름의 고민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고민이 있나?

(침묵)


잘 알겠다. 하루는 어떻게 굴러가는가?

8시, 9시쯤 일어나서 수업을 듣고 해야 할 일을 한다. 해야 할 일이라 하면 과제를 하고, 책을 읽고, 세미나를 준비하는 것 정도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기 때문에 동선은 간단한 편이다. 아, 종종 경희대로 향하는 길을 따라 산책도 한다. 그리고 언제나 8시경에 이른 잠에 빠진다. 자정쯤 다시 일어나 끄적거리다가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잠든다.


여유롭게 들린다.

그렇지 않다. 여유롭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공부 얘기가 많으니 물을 수밖에 없다. 전공은 무엇인가?

사회학과다. 전공을 썩 좋아하지 않으며 국어국문학과를 좋아한다. 사회학은 너무나 거시적이어서 인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개인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학 쪽이 더 마음에 든다.


그래도 마르크스의 철학은 좋아한다. 앞서 말한 세미나 역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는 모임이다. 잘못된 것을 바꾸고자 하는 이론, 그 뜨거운 느낌이 좋다. 거시적 담론이라고 모두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노트는 어떻게 사용하나?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그대로 옮겨 적는 습관이 있다. 마냥 읽고 넘어가면 까먹으니까. 옮겨 적기 위한 공책도 따로 있지만 그걸 가져오지 않았을 때도 이 다이어리에 써두는 편이다.


아까 먼슬리에도 책 이름이 꾸준히 쓰여 있었다. 책을 많이 읽나?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는데 할 일이 없거나 할 일을 하기 싫을 때 읽는다. 최근에는 황병승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읽었다. 요즘은 시집 읽는 것을 즐긴다. 덕분에 내가 단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종종 느낀다.


적확하게 언어를 짚어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시의 목적인데 그런 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문학작품 중에서도 시는 그에 특화된 것이니 보고 있으면 좋다. 뭐 딱히 도움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인상적인 인터뷰였다. 공강인 것으로 아는데 다음 수업은 언제인가?

안갈 것이다. 오늘 쉬는 날이다. 그 기준은 마음 가는대로 정한다. 엄마가 이 인터뷰 보면 죽이겠다 싶다.


혁명가 X는 주어진 질문 하나하나에 한참이나 말을 골랐고 심지어는 침묵하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서는 마음 가는대로 쉬러 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X 자신만 알뿐,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