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관음기] 1화 실없는 Y의 고급진 다이어리

*여기에서 다이어리란 단순히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날짜별로 간단히 글(일정, 감상)을 쓸 수 있는 수첩을 말한다.


다이어리 쓰는 것, 아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이어리를 썼던 이유는 내가 쓴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할 정도다. 과거형이라는 것을 눈치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못 써서다. 쓴 걸 볼 때마다 괜히 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남의 다이어리를 보기 시작했다. 자기 다이어리를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딱히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질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맨 마지막 부류의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다이어리를 구경해도 되겠느냐고 공손히 묻는다.


나는 다이어리를 오래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이를 향해 (존경의) 별빛을 쏠 수 있는 사람이므로, 내 눈빛에 당황한/우쭐한 그들은 대개 그러라고들 한다. 혹은 이 페이지, 이 페이지는 안 돼 하고 간단한 규율을 알려준 후 조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이어리를 감상하는 것에도 기준은 있다. 소소하게 그 사람이 잘 드러나는 다이어리가 좋다. 그 사람은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시간을 보냈나, 보고 난 영화 티켓을 붙이는가, 무심하게 낙서를 하는 편인가 하는 것. 이 글이 단순한 다이어리 감상기가 아닌 '관음기'인 이유다.


대체 무슨 말이지 싶은 독자들도 있겠지만 아직 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내 주변 사람들의 평범한 다이어리를 함께 관음해보자. 나와 같은 취향을 갖고 있던 사람이 많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아니라면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신의 내밀한 취향을 발견하게 될지도.




룸메이트 Y의 다이어리다. Y는 흔쾌히 다이어리를 내어주며 "이 다이어리 좋은 거야.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지 몰라"라고 말했다. 이로써 Y가 실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단번에 증명됐다. 그러니까 이건 실없는 사람의 실없는 다이어리다.


Y는 나에 대한 생각이 담긴 페이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허락된 페이지는 작년 연말과 올해 연초의 먼슬리, 위클리다.



다이어리를 쓴 지는 얼마나 되었나?

"1년 정도. 원래 스터디 플래너만 쓰던 사람이었다."



그렇군. 앨리스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참 좋아한다. 동화 시리즈의 다이어리였던 것 같은데 앨리스 표지가 가장 예뻤다. 다른 것은 매우 유치했다."



많고 많은 다이어리 중 왜 하필 이 다이어리인가?

"고─오급져 보이는 것을 찾았다. 앤티크 스타일의 녹색 표지에 금박이 입혀져 있다. 부유한 기운이 느껴진다. 심지어 이런 건 오래될수록 고급지다. 마치 내가 오래전부터 글을 쓴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놀라운 전략이다. 그렇다면 다이어리의 주된 용도는 무엇인가?

"일정을 적는 것, 스스로에 대한 질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 정리 정도다. 보통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식의 말조심하자는 자아비판이 주를 이룬다."



스스로에 대한 질타라니 성찰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쓰긴 하는 것인가?

"일주일 내내 쓰기도 하고, 쓰기 싫을 땐 그냥 안 쓴다. 망언을 뱉었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날에는 특히 쓰지 않는다. 난삽한 욕 천지가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라앉은 후에 정갈하게 쓴다.”





그렇다고 하기엔 26일 자 위클리에 쓴 감탄사 ‘시발’이 너무나 적나라하다

“썩 기분이 엉망인 날도 아니었고 그전에 내게 ‘시발’은 욕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라앉은 후에 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갈하게 욕을 쓴다는 것이다.”



위클리는 전반적으로 하루 동안 한 일을 나열하는 식이다

"다이어리의 목적은 '이날 내가 이랬구나'하는 걸 떠올리기 위해서다. 안 쓰면 뭐했는지도 모르고 하루가 사라진다. 한 페이지 전체를 느낌으로 채우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 뭘 먹었으며 어딜 가 무얼 보았다 하는 식으로 쓰기도 한다. 나중에 봤을 때 그 기분이 그대로 살아나게 쓰는 것이 포인트다.”



기분 나쁜 날의 기분도 살아나게 할 것인가?

“아마 그날만큼 심각하지는 않을 테니 되새겨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일은 자세히 쓰지도 않겠지. ‘잊자’ ,‘미쳤다’ 정도로만 써두지 않을까.”



사진 붙은 건 무엇인가?

“크리스마스에 받은 선물을 찍은 것이다. 인상적인 사진은 인쇄해서 붙이기도 한다. 사실 원래 안 붙이는데 그날은 유난히 흐뭇했다.”






화이트로 지운 것은 무엇인가?

“애초에 잘못 써서 지웠다. 일-월 시작이 헷갈리는 바람에.”



19일 자 먼슬리에 ‘상담 있는 날’이었는데 곧이어 ‘→안 감’을 덧붙였다. 나는 이런 것을 잘 못 견디는 편인데 쿨하게 쓰는 모양이다.

“안 간 것도 사건이다. 무엇 때문에 안 갔는지 쓰면 될 것 아닌가.”



알겠다. 전반적으로 바빠 보인다.

“할 일이 많아 보이기 위해 신변잡기를 다 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 달에 매우 바빴구나' 하고 흐뭇할 수 있다. 예전에는 중요한 것만 따박따박 썼는데 너무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은 다 쓰고 바쁜 척하기로 했다.”



좀 더 자세히 관음하자면 친구 S를 많이 만난다. 학원도 가고 상담도 받는다. 종종 병원도 보인다. 생활 전반을 간단히 묘사해 달라.

“몸이 좋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학원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간 것이지 수강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과외를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서울에 친구가 세 명 있는데 한 명은 인도에 가 있고 한 명은 수원에 있어서 S를 주구장창 만나던 시기다. 아, 상담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간다. 서울에 친구가 세 명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덧붙여 말하고 싶은 건데 상담받는 것을 매우 추천한다. 특히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이들은 모두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본인 성적 좋았다고 자랑하는 것인가?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나는 전교 2등이었던 것이다. 자랑이 아니라 팩트다.


상담을 특히 그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며 자랐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다이어리에 공부 관련한 내용이 없다. 대학생 아닌가?

“대학생이지만 대학생이 아니다. 대학생이라는 지위로 단순히 규정될 수 없는 독립된 자아로 보아 달라. 그리고 대학생도 원래 공부 안 한다. 역할 기대가 사람을 잡아먹는 현실이 안타깝다.”







좀 더 뒤쪽으로 가 보자.

“노트 칸에는 이전에 일하던 학원에서 몇 시간 일 했는지 써 두었다. 일종의 일수 일지라고 할 수 있다. 고용주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록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슬리에도 대충 무엇에 얼마의 돈이 나갔는지 기록해둔다. 돈 관리에 관심이 생긴 것은 최근이다.


또 다이어리 맨 뒷장에 붙어 있는 봉투 안에는 스티커 두 장이 들어 있다. 딱히 설명할 것은 없고 원래 다이어리 살 때 들어있던 앨리스 스티커와, 제주도에 여행 갔다가 사온 조랑말 스티커다. 보여주자니 취향을 들킨 것 같아 왠지 부끄럽다.


그리고 마지막 장 신원정보를 쓰는 곳에는 휴대전화 번호와 ‘주우신 분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는 글귀만 썼다. 개인정보 유출이 두렵다.”





Y는 몇 차례나 이어진 추가 인터뷰 요청에도 흔쾌히 답변을 해주었다. 실없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고급진 Y의 고급진 다이어리로 첫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