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1학기 편 BY.라별




 1. 비루한 내신성적, 편차 큰 모의고사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공부 깨나 한다'는 소리를 어지간히 들어보았어도 역시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반에서 2등한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성적은 오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쭉쭉 떨어졌다. 거기다 제대로 도진 수학 공포증 때문에 모의고사도 내신도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언어를 높은 곳에서 시작하면 수리로 급하강하는 불균형한 점수를 갖고 있던 나는 수시 1학기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냥 꾸준히 공부하면 어련히 성적이 오르겠거니, 모의고사 점수가 훌쩍 뛰겠거니 했다. 어차피 학원에도 못 다니는데 집에서 시간 죽이지 말고 야자나 하자-는 상당히 기특한(이라 쓰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라고 읽는다) 결정을 했고, 3학년 때까지 나의 야자 생활은 지속되었다.



 2. 스펙터클하고 아스트랄했던 질풍노도의 시기, 고2


 고2 시절 나는 참으로 예민했고 불안했다. 좀처럼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허접한 내신과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은 수리 점수에 좌절하고 있던 차였다. 내신도 수 비율(우린 수우미양가 마지막 세대였다)을 15%로 맞춘다며 얼토당토않는 문제를 내기 시작해 윤리 평균이 50점대에 머무를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온몸으로 부딪치느냐, 잠시 현실도피를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당당하게 후자를 택했다. 내년부터는 빼도 박도 못할 고3이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불태워야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스트레스만 쌓이는 교과서를 볼 시간을 조금 줄여, 책을 보았고 신문을 훑었다. '논술 공부 미리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댈 수 있었으니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 책을 봤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제일 선명하게 떠오르는 책 제목은 <너 행복하니?>다. 그 질문은 내 가슴을 꿰뚫고 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다들 미친듯 입시에 매달리고 있는데 자기만의 생을 그려가는 또래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무척 충격받았다. 그 책으로 하여금 내 소심한 일탈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인을 위한 교양 사전>을 읽고 처음으로 저자로서 '강준만'을 만났고,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독서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고1 때 처음 발을 들여서 고2가 되는 겨울방학 때 완전 빠져버렸다. 온라인 인맥도 많이 만들고, 엄청난 열정으로 매일매일 포스팅을 했다. 블로그 이웃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 보낸다고 가슴 설레했고, 오늘은 어떤 게시물을 올릴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꽉 들어찼었다.



3. 논술과의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싶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내게 논술은 모든 것을 뒤집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애먹었다. 4시간짜리 수업에서 2시간은 문제 해설을 듣고 나머지 2시간은 넉넉하게 문제 풀 시간을 주셨는데, 모르는 단어도 많고 이해가 안 되는 개념도 많아서 (티는 안 냈지만) 속은 문드러져가고 있었다. 늘 즐겁고 뿌듯한 놀이였던 글쓰기가 점차 고역이 되었다. 절망감이 들었다.

 논술은 역시 단기간에 느는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래도 신기한 건 집에 가서 숙제하는 건 질색을 하며 끝끝내 남아서 다 쓰고 갔다는 것이다. 애초에 글쓰기와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글쓰는 걸 좋아해서인지 맞춤법이나 문법 쪽에서는 딱히 지적당할 것이 없었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논술 선생님께서는 느낀 그대로 '네 글은 안정적이지만 재미가 없어'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었다.

 미치도록 좋아해서 심지어 DC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던 드라마 <궁>에 대한 애정까지 접고, 논술에 모든 걸 다 걸기로 한 보람이 있었을까. 조금씩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제시문 핵심을 잡아내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향상되어 칭찬을 들었다. 나는 생각해내느라 머리를 쥐어 짰지만, 풍부한 예시도 좋다고 하셨다. (상대적으로)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기출문제는 숙명여대, 성균관대였다. 그래서 이 두 학교는 꼭 쓰기로 마음을 먹었고 어느새 수시 1학기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1학기 수시에 붙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으므로 일단 '최상향 지원'을 해 보기로 했다.



4. 수시 1학기에 겁 없이 도전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일단 가고 싶은 학교 전형을 보기 좋게 딱 정리해 두었다. 어떤 서류가 필요하고 대학별 고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숙지해 두었다. 논술학원에서 논술 경향을 익혀 두고 관련 기출문제를 푸는 '기본적인 준비'도 열심히 했다. 각 학교마다 특징이 다르다 보니 약간 벅찼다. 이를테면 동국대는 서류 통과한 다음에 논술을 보는 식이어서 기약없이 서류 통과를 기다려야 했고, 중앙대는 수리논술이 있다는 괴소문이 돌아서 시험 보러 가기 전부터 간이 콩알만해지는 불운을 겪었다. 경희대는 내신, 논술에 심지어 인적성까지 본다 하여 인적성 문제집도 구비했다. 성균관대가 그나마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자기평가서(10)+내신(50)+논술(40)의 비중이었다. 내 이야기는 워낙 신나게 풀어놓는 편이었지만 '매우 공적인 문서'여서 마구 긴장한 채로 썼다.



 성대가 시험 일정이 제일 빨라서 7월 27일인가에 봤는데 그 전날 기출문제를 2-3개 썼고 밤 11시까지 남아서 끝까지 첨삭을 받고 갔다. 내가 이토록 악바리 같이 뭔가에 매달린 적은 노는 것 외에는 거의 처음이었다. 그 전날 연습하던 문제가 인간 본성과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여서 얼어있었는데 다행히 문제는 어렵지 않게 나왔다. 문제를 다 풀고 났더니 검토할 시간이 아주 빠듯하게 남았다. 정시에 제출.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해서 엄마께 기쁜 소식을 알리려는데 진짜 거짓말 안하고 모두가 '아 시험 쉬웠어' 이런 반응이라 눈물이 핑 돌 뻔 했다.

 경희대 시험은 못 쳤다. 중앙대와 날짜와 시간이 겹쳤고, 인적성까지 요구하는 무리한 부탁(?)에 금세 포기했다. 중앙대는 수리논술은 나오지 않았고(오 주여!) 문제도 되게 쉬웠다. 정말 스스로 만족스러운 답안지를 썼기 때문에 괜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 상승세를 꺾은 것은 동국대 낙방 소식이었다. 심지어 서류 불합격이니 내가 얼마나 평균을 낮추는 나쁜 내신을 지니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결과 발표? 4개 학교를 썼지만 두 군데는 제대로 도전도 못하고 안녕. 시험을 친 두 학교 중 먼저 발표가 났던 곳은 중앙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공황 상태가 되었다. 성균관대는 분명 22일인가 23일에 난다고 했는데 확인하는 곳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4일, 운명의 날. 나는 신세계를 맛봤다. 07학번이 된 것이다.
 
 

 5. 신은 있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돌아온다


 내 비루한 모의고사와 내신으로 입시에 도전했다가는 얘가 분명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도 모르고 삽질만 하겠구나- 하셨는지 신은 날 도왔다. 문제가 쉬웠고, 하필 나 때까지만 수시1학기가 존재했고, 자기평가서도 그럭저럭 괜찮게 썼고, 내신도 딱 최하 커트라인에 걸쳐 있었다(5점 만점에 4.3).

 스스로 너무 과분한 학교에 왔다며 자신을 낮추는 탓에, 가끔은 내가 정말 뭣도 모르는 날라리 고딩이었는데 대학 간판만 잘 만난 '희대의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 그 말이 완벽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난 나만의 차별화된 포인트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논술만큼은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만큼. 실상은 평가자들이 보기에 '음 넌 아주 나쁘진 않으니 뽑아줄게'였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40:1이라는 다신 못 뚫을 경쟁률을 헤쳐 나갔으니 나름대로 인생에서 진한 획을 하나 그은 것이다.




 여전히 나는 송구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래도 그때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둥바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철저한 학벌주의 사회라고 하나, 결국에 이 간판은 직장을 구하고 나면 일정 부분 흐려진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대학 간판에 기댈 수 있는 시간은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때뿐이라고 본다. 어느 학교 소속의 누구가 아니라, 내 이름 세 글자만으로 존재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공을 기르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몫이다. 이미 학교에서는 다 시들어가는 3학년이라 입시와는 매우 멀어졌지만, 오랜만에 옛일을 추억하며 썼다. 아 물론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아무 곳에나 적용하면 위험하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항상 욕 먹는 입시제도이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들어야 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야무지게 잘 버티고 시험을 목전에 둔 그대들에게 분명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 넘치는 패기와 무모한 자신감이 무기였던 그때의 모습은 조금씩 바래져, 적당히 닳은 인간이 되었지만 이것만은 알고 있다. 신은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 쉼 없이 달려와 결승선을 앞에 둔 가슴이 터질 듯한 이 순간, 긴장을 한 스푼 덜고 자신감과 본인에 대한 신념을 두 스푼쯤 넣어 달콤한 성과를 들이킬 수 있길.

 모든 수험생들이여,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