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매체들에서 명절마다 반복적으로 써 내려가는 레퍼토리에 최근 추가된 항목이 있다.  바로 ‘명절 때 가장 듣기 싫은 말’ 시리즈다. 아직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10대와 20대 청춘들에게는 명절에 미래를 논하는 일이 가장 두렵다. 성적, 지망 대학, 진로, 결혼 계획 등 껄끄러워서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과도 잘 얘기하지 않는 문제들을 툭툭 던지는 말로 묻는 가깝고도 먼, 그런 친척들에 대한 얘기다.

이 불편한 도마 위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형식적인 이야기만 오가는 명절 분위기에 질려버린 그들은, 이제 친척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에 ‘학원행’을 택한다. 명절이고 빨간 날이고, 가족이고 친척이고 공부가 우선이다. 좀 잘 나가는 또래 친척들 사이에서 받는 열등감도 안 느끼고, 자신을 위한 투자도 할 수 있으니 꽤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졸업 후 무엇을 할 것인지’, ‘대학은 어디에 갈 것인지’ 같은 꺼림칙한 질문에 대한 ‘명절에도 안 놀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암묵적 대답도 된다.

고향 대신 학원을 향하는 행렬의 선봉에 선 것은 다름 아닌 입시 수험생들이다. 수능을 60여 일, 수시 전형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들에게 명절이라고 공부를 쉬는 것은 사치다. 고3 주제에 시골을 찾으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받을지도 모르니, 당장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매진해야만 한다.

 

입시 학원들에서는 이 점을 파고들어 ‘추석특강’이라는 이름으로 단기 특강을 개설한다. 대다수의 학원에서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 간 하루도 쉬지 않고 강의를 운영한다. 소위 ‘강남 8학군’에 몰려 있는 논술 학원들도 수시 전형을 대비한 대학별 논술 첨삭 강좌를 운영한다. 학원 수강료만 해도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논술학원에서 첨삭 교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 한수지(가명) 씨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진지한 태도로 글 첨삭을 받는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한 씨는 추석 연휴 중 사흘 간 오전에만 일하고 18만 원의 급여를 받을 예정이다.

대학교 4학년인 한 씨도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 겸 해서 이번 추석에 고향을 찾지 않는다. 점점 더 대학생들에게도 명절 귀향이 선택의 문제로 변화하고 있다. 대학생 조은석 씨도 추석을 추석 같지 않게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들 중 하나다.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토플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조 씨는 추석 당일을 포함해 연휴 내내 토플학원을 찾을 예정이다. 강의는 없지만 공부를 쉬면 리듬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 씨는 “명절을 서울 근교에서 쇠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잠깐 갔다 올 수는 있지만, ‘졸업하면 삼성 가냐’는 말도 피하고 싶고 해서 올해는 학원에 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명절이면 모두 모이던 또래 친척들도, 취업 준비다 삼수다 하면서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더라고요.” 이제 그에게는 어린 시절 설레던 명절은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출처 : http://sdc21.org/

TV 속에 나오는 화목한 가족의 명절, “시골 오는 길도 힘들고 집안일도 고되지만, 일단 가족들이 다 모여서 좋아요.”라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들도 부러워할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 명절이 오면 설레던 감정을 간직한 채, 언젠가는 다시 그 설렘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껄끄럽고 ‘듣기 싫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날이 될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면, 대학생들은 괜찮은 취직자리를 구하고 나면 명절이 더 이상 두려운 시간이 아닐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미 몇 년의 시간 동안 잊었던 즐거움이 좋은 스펙을 갖춘다고 해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보장이 없다. 문제는 청춘들의 불안한 미래가 아니라, ‘불편한 질문’들밖에 나눌 수 없었던 취약한 친척 간의 대화 능력이기 때문이다.

‘명절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라는 레퍼토리도 십 년쯤 후엔 다른 꼭지로 대체될 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고향을 찾는 사람들’, ‘조상들은 추석에 무엇을 했나’ 정도의 제목을 달고 말이다. 사실상,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