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지병으로 인해 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9월 6일 오후, 이소선 여사를 기리는 ‘추모의 밤’ 행사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를 주제로 열렸다. 이 행사에는 장례위원회 관계자와 시민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의 밤 행사는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앞과 제주도 강정마을 등 전국 6개 장소에서 동시에 열렸다. 

이어 7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과 이주호 특임장관, 손학규 민주당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종복 목사의 사회로 발인 예배가 열렸고 이후 혜화동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이날 영결식에는 사회 각계 각층의 조문객들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서 이뤄졌다.
 
전국을 애도의 물결로 만든, '노동 운동의 대모'로 불리던 이소선 여사.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고 그녀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까.




이소선 여사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아들 ‘전태일’


이소선 여사의 생애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그의 아들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 자결한 노동운동가이다. 1960년대는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 아래 우리나라가 한창 경제 성장의 박차를 가하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동운동을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효시로 기억한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사람이었다. ‘전태일 평전’을 보면 그는 스스로 그러한 환경들을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우울해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전태일이 일했던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끊임없이 작업환경의 개선을 요구했으나 그의 노력은 정부와 업주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좌절되기 일쑤였다. 그는 결국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에서 500여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 때, 22살이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꼭 안은 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하였다.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전태일 열사는 죽기 전에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전태일 열사에게 대답했던 이소선 여사는 평생을 이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40여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말할 때면 엄청난 괴로움에 휩싸였다고 한다. 한번 말하고 나면 나흘을 꼬박 앓고는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소선 여사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세월이 얼마가 흘렀건 그에겐 너무나 가슴 아픈 기억이다.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 열사는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사이좋은 모자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준 사람도 전태일 열사였다. 둘 다 고된 노동으로 피곤함에 찌든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 열사는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러한 기억 때문인지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아들과의 추억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을 잘 자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 이후로 전태일 열사의 친구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의 인권을 찾으려 노력했다. 사업주들이 노사협의회에 냉담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청와대 앞에 며칠을 쭈그리고 앉아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 적도 있다. 그는 결국 당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노사협의회라도 열 수 있게 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이소선 여사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이었다. 이소선 여사는 예전부터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때 의견이 갈라지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 하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쳤다. “전체 노동자가 힘을 모아 인간다운 권리를 꼭 찾아야 합니다. 노동자 여러분, 힘내세요. 언젠가는 노동자가 승리합니다.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삽니다.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때문에 이소선 여사는 같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단절되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매우 마음 아파했다. 그는 2006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손을 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노예처럼 일하게 된다.”며 노동운동 진영을 향해 호통치기도 했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불편한 몸을 이끌며 기꺼이 찾아갔다. 그렇게 살면서 세 번 옥살이를 하고 수 백번 연행됐다. 이소선 여사와 2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오도엽 시인은 “이소선 여사는 누가 농성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내가 아무리 걷지를 못해도 가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노동자의 어머니가 아니겠느냐’며 농성장을 찾아가셨다”고 전했다.  

또한 이소선 여사는 최근까지도 용산참사,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투쟁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또 올해 초에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싸우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 밑 천막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후, 이소선 여사가 노동 운동과 민주화에 투신하였던  40여년 동안 우리의 노동 환경은 얼마나 변화하였을까. 이소선 여사 같은 분들의 노력 덕에 현시대는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잠을 쫓기 위해 각성제를 맞히고, 어린 아이들을 공공연하게 혹사하는 가혹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노동계에선 여전히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린다. 파업은 끊이지 않고 노동자들과 경찰과의 살벌한 대치도 여전하다.

전태일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렇게 외치던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구호는 얼마 전에 터진 홍익대 청소노동자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청소노동자의  용역업체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한 편법을 사용하여 청소노동자들을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 청소노동자들은 저학력자, 노년층,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사회적 약자층이다. 이들은 불공정한 하도급 계약으로 불안한 고용 상태에 처해있고, 최저임금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35m의 크레인에서 250일이 넘게 농성 중인 노동자도 있다.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근로자들을 희망 퇴직시킨 한진중공업 측에 반발하여,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이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영도조선소를 찾아갔던 걸로도 유명한데, 이 때 이들을 저지하려는 경찰과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업체들과의 충돌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 전태일 열사가 전신화상의 고통 속에도 이소선 여사에게 잊지 않고 간절히 이루어달라고 말하던 사회일까. 경제 성장이 만병통치약처럼 우선시되면서 노동운동은 경제성장의 걸림돌 취급을 받아왔다. 노동유연성 확보를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고,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루어졌지만 이소선 여사가 원하던 ‘차별 없는 세상’은 갈 길이 멀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요즘 뉴스를 볼 때면 독재 시절보다 더 지독한 것 같다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항상 겸손하면서도 날카롭게 이 사회를 비판하던 이소선 여사가 죽기 전까지 그토록 바라던 사회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