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청각장애 아동 성폭행으로 파문을 일으킨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 그러나 정작 영화 속에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사회 안에서의 장애인 처우보다 학연 지연으로 똘똘 뭉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었다. 공지영 작가는 ‘법정에서 그들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때 내지 못하는 소리로 대성 통곡하는 청각장애인들의 울음을 생전 들어본 적 없었지만 마치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내지 못하는 소리로 울 만큼 그들을 답답하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의 학연 지연으로 똘똘 뭉친 그들만의 세상이 아니었을까.

전라남도 무진의 한 마을, 안개가 자욱한 이 마을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마을에는 청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애 학원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쌍둥이였고, 기숙사의 사감은 재단 이사장의 딸임과 동시에 교장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였다. 교장은 지역 경찰에게 주기적으로 봉투를 건넸다. 성폭행 재판이 시작되고 지연으로 연결된 변호사가 가해자 측 변호를 맡게 된다. 성폭행 아이들을 진단한 산부인과 의사는 가해자가 유리하도록 증언을 번복하는데 교장의 부인과 학연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말도 안 되는 진술로 피해자를 불리하게 했던 학교 수위는 교장과 지연으로 연결된 관계였다. 피해자 쪽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는 결정적인 증거(교장이 아이들을 성폭행한 CCTV 녹화 테이프)를 그들의 ‘무언가’에 넘어가 판사에게 제출하지 않았고 결국 재판은 그들이 1년 이하의 징역과 2년 이하의 집행유예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답답하고 답답한 이 이야기는 장애인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세상의 위선을 들추는 적나라한 시선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학연과 혈연, 지연의 피해자는 장애인이 아니라 돈 없고 빽 없는 사회의 약자 곧 일반 국민이라면 당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습이었다.

영화 속 강인호의 엄마는 강인호에게 “니도 니 갈키는 애들코롬 입닫고 귀닫고 살면 되는 기다. 누군 옳은 말 할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줄 아나?” 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의 말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모두가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옳다고 입을 통해 밖으로 외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옳은 일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른 일을 그르다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러운 권력과 추악한 현실 앞에서도 돈과 학연,지연에 가려 입도 닫고 귀도 닫아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개인적인 학연과 지연에 얽혀 일어나는 사회의 부조리한 사건들은 이루 말하지 않아도 많다. 2달 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회사 10곳 중 7곳은 학연지연에 의한 사내 파벌이 존재하며 가장 심한 곳은 공기업이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학연과 지연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곳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자애학원 청각장애인처럼 피해자가 되어도 말하지 못하고 언제나 당하기만 한다. 사회 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귀가 부족할 뿐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할 입이 더욱더 부족하다.



많은 대학 입시생들이 일류 대학을 고집하는 것은 출세를 위함과 동시에 미래의 인적 네트워크를 위해서이다. 앞에서 이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줄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채워 나가는 것이다. 인적 네트워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인터넷이 발달한 정보사회에 어차피 공유하는 정보의 양은 같을 것이고 그렇다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인적 네트워크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가 혈연과 지연, 학연에 얽매인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좌측통행을 하는데 홀로 우측통행을 하다 보면 제대로 걸어나가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사회에는 혈연과 지연, 학연을 따지는 사람만 가득하게 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소멸하게 된다. 진화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것이다. 개혁을 주장하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수에 포함된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결국에는 두 손 들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의 제목인 도가니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온갖 거짓과 비상식이 들끓는 광란의 도가니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런 비상식적인 세상에 녹아들어서는 안 된다. 광란의 도가니에서 같이 날뛰면 안 된다. 비록 광란의 도가니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리고 벗어나는 길을 찾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설령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광란의 도가니가 감동의 도가니로 바뀌는 그 날을 위해서, 소신 있게 자신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약자를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세상에 외칠 수 있는 입. 사실을 은폐하기보다는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