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부모님의 연애시절 사진을 보고 가슴이 설레고, 헌 책방의 쾨쾨한 냄새를 좋아하며, 유행하는 일레트로닉 음악보다는 통기타에서 울리는 소소한 음악에 더 끌리는 당신. 그대에게 딱 맞는 ‘아주 오래된 낭만’을 선물합니다.


구십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에겐 잠도 벗도 없었다. 모두 세월이 앗아간 덕분이다. 대신 할아버지는 적적한 하루를 그저 하릴없는 리모콘질로 채우며 지내셨다. 그러나 유독 할아버지의 리모콘질이 단호해지는 시간이 있었으니, 일요일 낮 12시 전국 노래자랑이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 되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9번을 틀고 나는 아무리 봐도 재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참가자들의 노래에 즐거워하셨다. 일요일 낮 할아버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간은 흘러 할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고 그렇게 우리 집에 흐르던 송해 아저씨의 여유로운 진행과 구수한 입담도 사라졌다. 대신 우리 집에는 단 한명의 슈퍼스타K가 되기 위해 달려가는 어린 참가자들의 치열한 경쟁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동안 슈퍼스타K의 우승자가 벌써 세 번이나 가려졌고 다른 누군가는 옷을 지었으며 17살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은 멋진 워킹을 뽐내었다. 꿈을 향한 그들의 풋풋한 진심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 풋풋함이 경쟁 앞에서 어리석은 욕망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애처로워졌다. 아니 이 애처로움은 나 스스로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해 다시 풋풋한 진심만 남아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끝 없는 경쟁에 지쳤고 경쟁의 현실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더욱 질려버렸다. 그 후로 나는 언제부턴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봐도 슬며시 채널을 돌리게 되었다. 대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영원히 볼 일 없을 것만 같았던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손길이 멈추었다.


확실히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은 톡 쏘는 맛은 없었다. 왜 그럴까?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프로그램에 연출이 없겠느냐마는 성공과 노래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출연자들의 이야기가 연출되는 것과 지나간 삶의 궤적을 노래로 고스란히 표현하는 건 분명 달랐다. 전국노래자랑에서는 내일 결혼하는 신랑이 나와 예비 신부에게 작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현철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부른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한 노래도 아니요, 감동을 극대화 하기위해 결혼식 바로 전날 출연한 것도 아니다. 그저 평생 함께갈 신부에게 잊지 못할 작은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새내기 남편의 풋풋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국노래자랑에서는 노래가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 프로그램에는 약간의 음치, 박치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노래할 수 있다면 그 누구나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비록 부르자마자 땡일지라도. 또한 표면적으로는 연령 제한이 없다고 말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프로가 되기엔 조금 곤란한 나이라는 이유로 'sorry'를 주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어린 아이에서부터 호호할머니까지 누구나 자신의 나이에서 그릴 수 있는 삶을 노래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연령제한이 없는 전 연령이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부르는 삶의 노래는 그곳에 있는 관객들과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시청자들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한다. 눈물 쏙 빼는 절절한 이야기는 없지만 ‘내일 결혼해요.’ ‘제가 잡은 생선한번 먹어보세요.' 등등 소박한 사연은 작은 미소를 짓게 한다. 어제도 일어났고 오늘도 일어날법한 우리네 평소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동료들은 그들의 삶과 노래를 응원하기 위해 플랜카드를 들고 전국노래자랑에 놀러온다. 그런데 출연자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가족친지들뿐만이 아니다. 출연자들을 전혀 모르는 이들조차 그들의 이야기에, 노래에 흥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얼쑤절쑤 춤을 춘다. 내가 응원하는 출연자가 꼭 우승해야하는 법은 없다. 그곳에 나온 모든 출연자가 나의 이웃이고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마치 모두가 함께 즐기는 마을축제인 듯하다.


출연자들의 모든 노래자랑이 끝나면 최우수상, 우수상 등 상을 받을 출연자들이 가려진다. 웃고 즐기는 무대 내내 사실 심사위원들은 그들의 노래를 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제 점수는요...’ 따위의 말도 톤이 어떻다느니 감정이 오버 했다느니의 평가도 하지 않는다. 감정도 오버하고 높은 음도 버겁지만 진정으로 즐기는 출연자들의 무대 앞에서 누가 더 낫다는 평가는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그들의 춤에 함께 빠져들어 즐거워한다. 출연자들도 수상하지 못해도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다. 애초 그들의 목적은 무조건 1등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후에 인생을 살면서 힘이 들 때 작은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했다는 추억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심사 위원만큼이나 MC의 역할도 오디션프로그램과는 사뭇 다르다. 오디션프로그램의 MC는 후에 누구를 편애하니 어쩌니 하는 뒷말을 듣지 않기 위해 기계적인 중립을 지킨다. 특히 슈퍼스타K3의 마지막 회는 마치 선거 개표방송을 보는 듯했다. 모든 상황이 철저하게 대본 하에서만 통제되고 MC는 앵무새처럼 자신의 감정은 절제한 채 객관적인 득표율만 침착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노래자랑의 송해는 ‘쟤들 참 예쁘지 않어?’말하며 흐뭇해하기도 하고 출연자들과 서로 주고니 받거니 한편의 콩트를 펼치기도 한다. 때론 출연자들이 돌발 상황을 일으켜 30년 경력의 송해조차 당황케 하지만 송해는 그마저도 노련한 관록으로 풀어낸다.


내 마음 속 타인의 욕망이 가라앉고 진정 나를 위한 욕망만 존재하는 이 순간 전국노래자랑을 다시 보니 할아버지가 왜 그리도 전국노래자랑을 좋아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의 마감을 앞두고 계셨던 할아버지에겐 단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대위에서 벌벌 떠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덧없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6.25전쟁으로 당신의 고향 북청을 두고 아무것도 없는 남쪽으로 넘어와 지금의 일가를 이루기까지, 할아버지도 젊었을 적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 욕망을 탐내고 뽐냈을 터이다. 하지만 먼 길 떠나야하는 목전에 서있으니 꼭 1등이 되어 무언가를 움켜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노래자랑 속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하는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웠을 테고 부러우셨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늘 손녀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유독 전국노래자랑만은 단호하게 고집하시고 집착하셨다. 벌써 할아버지가 떠나신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유독 요즘에서야 할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바라보았던 그 마음이 그립고 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