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첫 외박 가서 신나노? 내한테 교양 (일종의 훈계) 좀 듣고 가라”
평소 나를 괴롭히던 고참이라 겁이 났다. ‘혹시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걸 들은 건 아닐까? 거의 안 들리게 했는데’ ‘첫 외박인데 엄청 혼내지는 않겠지?’ 고참에게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막상 다가가니 표정에 장난 끼가 가득했고 전혀 혼내려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어서 안심이 되었다.
“(흐뭇하게 쳐다보며) 내가 사랑하는 후임 정훈아, 형아한테 이번 달 ‘맥심’좀 갖다도 (갖다줘). 일단 니가 사서 다~아 읽어보고 내 주면 된다. 알았제?”
유인나 때문에 '레전드 맥심'이 된 2010년 1월호
맥심을 좋아하는 군인은, 경상도 말씨의 마초스러운 고참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군인은 맥심을 좋아했고, 새 맥심이 나오면 고참부터 후임까지 전부 돌려보았다. 내무반 책꽃이에는 이미 100번 정도의 손이 탄 듯한 과월호들이 달별로 차곡차곡 꽃혀있었는데, 누가보면 내무반 자체에서 정기구독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인기 있는 표지모델이 나온 달은 손을 너무 많이 타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기도 했으며, 맥심에 나온 수많은 모델들은 가위나 칼로 오려져 군인들의 관물대 속 포스터가 되기도 했다.
특히 맥심은 패션잡지류의 허세스러운 느낌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가벼운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피곤하고 생활이 팍팍한 군인들에게는 어렵고 딱딱한 글보다는, 여자 연예인들의 화보가 많고, 쉽고 재미있는 가쉽이 많은 맥심이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일반인들은 맥심에서 나오는 가쉽이나 자극적인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전부 구할 수 있지만, 군인들은 인터넷이 안 되거나, 이용하기 불편한 환경에 있다는 점도 군인들이 맥심을 사게 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맥심만 보면 열렬히 환호했던 군인들이, 제대하고 나서까지 맥심을 구독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나와 같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맥심을 봤던 군대 동기들이나, 고참들에게 맥심을 지금도 보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공통된 반응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걸 쪽팔리게 밖에서 어떻게 보냐?”
속된 말로 “남들 앞에서 보기에 쪽팔린다.”가 맥심을 안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였다. 이번 달 표지만 보더라도 제시카 고메즈의 비키니 사진인데, 이걸 20대 남성이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당당하게 보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지 않는가? 그리고 맥심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표지 사진이나,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맥심 화보를 보고 'B급 잡지‘ ’도색 잡지‘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점도 맥심을 꺼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잡지의 내용을 봐도 딱히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볼만한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다. 소위 19금이라고 불리는 섹스 이야기는 인터넷에 더 잘 나와 있고, 여자 아이돌이나 연예인 자료도 인터넷에 더 많을 것이다. 특정 분야 매니아들의 취향을 충족시킬만할 정도로 전문적인 내용은 부족하다. 맥심의 장기인 ‘순위 매기기’, ‘ㅇㅇ 리스트 30선’ 은 케이블 TV에서 더 재미있게 한다. 그나마 맥심의 미덕이라면, 여자 연예인의 섹시한 매력을 살려주는 화보가 실린다는 것, 그 뿐이다.
연평도에 맥심이 반입이 안돼서 맥심에 하소연하는 글을 보낸 직업군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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