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외박을 나가는 아침이었다. 고작 3박 4일이지만 탈출이었다. 집에 가면 뭘 먹을지, 누굴 만날지 머릿속에 실컷 그려보고 있었다.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던 나머지 집에 갈 채비를 하면서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고참의 신경질 적인 경상도 사투리가 내무반 구석에서 들려왔을 때 콧노래는 바로 멈춰졌다.

“야 첫 외박 가서 신나노? 내한테 교양 (일종의 훈계) 좀 듣고 가라” 

평소 나를 괴롭히던 고참이라 겁이 났다. ‘혹시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걸 들은 건 아닐까? 거의 안 들리게 했는데’ ‘첫 외박인데 엄청 혼내지는 않겠지?’ 고참에게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막상 다가가니 표정에 장난 끼가 가득했고 전혀 혼내려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어서 안심이 되었다.

“(흐뭇하게 쳐다보며) 내가 사랑하는 후임 정훈아, 형아한테 이번 달 ‘맥심’좀 갖다도 (갖다줘). 일단 니가 사서 다~아 읽어보고 내 주면 된다. 알았제?”

유인나 때문에 '레전드 맥심'이 된 2010년 1월호




군인의,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맥심

맥심을 좋아하는 군인은, 경상도 말씨의 마초스러운 고참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군인은 맥심을 좋아했고, 새 맥심이 나오면 고참부터 후임까지 전부 돌려보았다. 내무반 책꽃이에는 이미 100번 정도의 손이 탄 듯한 과월호들이 달별로 차곡차곡 꽃혀있었는데, 누가보면 내무반 자체에서 정기구독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인기 있는 표지모델이 나온 달은 손을 너무 많이 타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기도 했으며, 맥심에 나온 수많은 모델들은 가위나 칼로 오려져 군인들의 관물대 속 포스터가 되기도 했다.

사실 맥심 말고도 책은 많았다. 누가 갖다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무반에는 김훈의 ‘칼의 노래’,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심지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같은 책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유독 맥심을 즐겨 봤다. 물론 지큐나 아레나등의 동종 남성잡지도 종종 매니아들에 의해 읽히긴 했지만 그래도 맥심의 열독률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맥심은 20~30대 주요남성들, 그 중에서도 군인에게 인기를 끌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왜 군인들이 맥심이면 사족을 못 쓰는지 궁금했던 분도 있었겠지만, 목차만 봐도 어느 정도의 궁금증은 풀린다. 2011년 11월호 맥심 목차를 살펴보면 Love 섹스 많이 하는 법, 에이프릴 키스(여자 아이돌) 인터뷰, 맥심2011RPM Award(차 관련 섹션), 성공률 100% 황천길 가는 법, 스모크 앤 드링크, Game(섹시여전사 원자현), RPG-7로켓포 등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남성들의 관심사를 골고루 반영하면서도, 자극적이면서 유머러스하게 글을 구성한다.

특히 맥심은 패션잡지류의 허세스러운 느낌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가벼운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피곤하고 생활이 팍팍한 군인들에게는 어렵고 딱딱한 글보다는, 여자 연예인들의 화보가 많고, 쉽고 재미있는 가쉽이 많은 맥심이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일반인들은 맥심에서 나오는 가쉽이나 자극적인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전부 구할 수 있지만, 군인들은 인터넷이 안 되거나, 이용하기 불편한 환경에 있다는 점도 군인들이 맥심을 사게 되는 요인이 된다.


군인 시절에만 보는 잡지, 맥심?

그러나 맥심만 보면 열렬히 환호했던 군인들이, 제대하고 나서까지 맥심을 구독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나와 같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맥심을 봤던 군대 동기들이나, 고참들에게 맥심을 지금도 보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공통된 반응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걸 쪽팔리게 밖에서 어떻게 보냐?”

속된 말로 “남들 앞에서 보기에 쪽팔린다.”가 맥심을 안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였다. 이번 달 표지만 보더라도 제시카 고메즈의 비키니 사진인데, 이걸 20대 남성이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당당하게 보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지 않는가? 그리고 맥심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표지 사진이나,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맥심 화보를 보고 'B급 잡지‘ ’도색 잡지‘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점도 맥심을 꺼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잡지의 내용을 봐도 딱히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볼만한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다. 소위 19금이라고 불리는 섹스 이야기는 인터넷에 더 잘 나와 있고, 여자 아이돌이나 연예인 자료도 인터넷에 더 많을 것이다. 특정 분야 매니아들의 취향을 충족시킬만할 정도로 전문적인 내용은 부족하다. 맥심의 장기인 ‘순위 매기기’, ‘ㅇㅇ 리스트 30선’ 은 케이블 TV에서 더 재미있게 한다. 그나마 맥심의 미덕이라면, 여자 연예인의 섹시한 매력을 살려주는 화보가 실린다는 것, 그 뿐이다.

맥심 코리아는 엄연히 말하자면 20대 중에서도 ‘20대 군인’을 수요로 삼아 돈을 버는 곳이다. 60만 군인들의 구매력은 맥심 한국판이 처음 나오던 2002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맥심이 건재할 수 있던 힘이 되었다. 고정적인 구매층인 군인들이 있었기에, '맥심 코리아' 상표권을 놓고 구 맥심(Maxim Korea Edition), 신 맥심(South Korea Maxim)이 다투며, 두개의 맥심이 동시에 발행되는 혼란기에도 맥심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평도에 맥심이 반입이 안돼서 맥심에 하소연하는 글을 보낸 직업군인도 있었다.


맥심의 앞날은 어디로?
   
맥심은 전 세계적인 잡지로 세계 35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로 남성잡지의 주 구매층인 20대~30대 남성들을 타겟으로 만들고 있다. 재미있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군인’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중요한 수요층이 된 특이한 케이스다. 60만 군인들이 맥심의 실질적, 또는 잠재적 구독자라면 맥심은 분명 엄청난 시장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만큼 안정적인 잡지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유독 군대에서 소비가 많이 된다는 점, 그에따라 맥심의 주요 컨셉트 역시 ‘군인들이 보기 좋은’ 잡지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은 결국 잡지의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상표권 분쟁 이후 맥심은 ‘군인들이 보기 좋은지도’ 의문스러운 수준의 잡지를 만들고 있다. 과거 맥심은 성역 없이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맥심 상표권 분쟁 때문에, 과거 한국에서 맥심 잡지를 운영하던 ‘DMZ 미디어’ 대신 ‘사우스막심코리아’가 새롭게 맥심 코리아를 운영하면서, 맥심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유의 색깔마저 잃어버렸다. 맥심만의 독특한 문체와 유머가 없다면, 맥심은 단순히 ‘약한 수위의 도색잡지’일 뿐이다. 군인들의 지갑은 엄청 얇다. 맥심이 계속해서 매력적인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군인들의 지갑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