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스물 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이 날은 내게 아무런 날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도 아니고 공휴일도 국경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2009년부터 7월 22일은 몹시 중요한 날이 되었다. 대리투표, 재투표 등 온갖 방법으로 표결이 되었고 그렇게 미디어악법은 '통과되었다'. 초등학교 반장선거만 해도 무효표와 기권표는 모두 걸러지고, 1인 1표제가 충실하게 실행되고 있는 21세기의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얼토당토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장 전국언론노조는 성명을 냈고, 입법부에서 일어난 전대미문(까지는 아닌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날치기 처리는 이전에도 계속되어 왔으니까)의 일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MBC를 비롯한 무수한 언론사들이 드러내 놓고 우려를 표했으며, 국민 정서 또한 이런 식의 미디어법 통과는 옳지 않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의견은 헌재 결정이 나오기 얼마 전인 10월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디어오늘과 언론노조가 지난 달 14일 전국 성인남녀 108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절반을 넘는 56.6%가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절차적인 문제가 있다'는 답을 내렸다. '문제가 없다'는 반응은 23.2%였고 '잘 모르겠다'고 한 비율은 20.2%였다. 더불어 헌재가 미디어법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무효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대답이 55.7%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반면 '유효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은 25.3% 정도였다. 특히 이번 설문조사에서 20~30대의 무효결정 응답이 각각 73.3%와 65.7%로 매우 높았던 점이 눈에 띄었다.(기사 참고 http://www.vop.co.kr/A00000270598.html)

 10월 29일은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날이었다. 지난 20일 명동에서 언론악법저지 및 미디어법 전면 무효를 기원하며 <미디어오늘>과 <시민과 언론>을 돌렸는데, 그 때도 길가 한복판에서 전국언론노조가 주최하는 '미디어악법 반대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시민들에게 이것이 무척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리고 서명을 부탁하고, 또 미디어악법이 시행될 경우 벌어지는 파장에 대해 나와 있는 소식지도 전달했다. 지금 상태로 봤을 때는 결국에 헛수고를 한 셈이 되지만 말이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헌재에 있는 재판관도 사람입니다. 권력의 힘이 두렵습니다. 괜히 책임 물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인 결정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좋으련만, 과정이 위법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 놓고도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며 딴소리를 해 대니, 국민으로서 답답한 맘을 금할 길이 없다. 물론 이번 판결을 순전히 '법리적'으로만 따진다면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이 없다. 입법부에서 벌어진 파행이니 입법부에서 의견 조율해서 잘 해결하라는 말이니,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입법부를 둔 게 죄가 됐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헌재로까지 넘어오게 됐는지 한 번이라도 곰곰이 생각했다면, 쉽게 그런 변명을 했을지 궁금하다. 입법부에서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 표결이 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이 들어간 해석도 가능한 민감한 사안이라서 옥신각신한 끝에 중재자에게 '판결을 요청'한 것인데 이제 와서 발 빼기라니 이게 웬 말인가.






 헌재의 소극적인 결정 덕에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물론이다. 이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비웃음섞인 패러디가 무수히 양산되고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위조지폐지만 화폐 효력은 있다'고 논평했고, 대리투표도 되는 마당에 시험도 대리로 치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 '토익 시험, 수능, 입사 시험 대리로 치면 어때요? 과정은 위법하지만 점수와 합격 여부는 유효한 것 아닙니까?' 하는 식이다. 누리꾼들의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싸늘한 반응이 나오게 된 원인 제공을 한 곳은 헌재 아니었던가.

 과정은 옳지 않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판결은 이미 선례가 있었다. 1997년 7월에도 노동관계법 등을 기습처리한 신한국당이 야당의 권한을 침해했는지 물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표결권을 침해하긴 했으나 법안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예전부터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저버렸으니 우리는 그저 수긍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다. 그보다 더 최근의 과거인 2004년 있었던 수도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관습헌법'까지 근거로 들며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기에 바빴던 헌재였다. 문제가 다르니 헌재가 하는 역할의 크기도 달라진다? 부족한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위법한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포착되었고 수집된 증거도 많아서 절차의 문제도 있고, 뿐만 아니라 시장 확대 및 미디어 발전과 언론 장악을 통한 국민의 눈 가리기라는 몹시 상반된 주장이 맞부딪친다는 내용 상의 문제도 있어서 더더욱 명쾌한 판결이 일어났어야 할 미디어법 문제. 7월부터 3달 가까이 끌어온 문제인데도 여전히 매듭짓지 못한 채 실마리를 찾지 못하게 됐다. 아마 연말정국의 가장 큰 화두는 앞으로도 쭉 '미디어법'일 것으로 보인다. 책임 소재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헌재의 결정 덕에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엄청난 절망감과 패배감을 맛보았고, 이래서 선거는 중요하다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 놓기에 이르렀다. 그나저나 참, 2009년은 여러 모로 혼란스러운 해다. 겨우 작년에 총선을 치렀다는 사실이 갑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