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을 다해 온 성의를 다해 필사적으로 이 글자(훈민정음)를 천시하고 천대해야 합니다. 계집들이나 쓰는 글자로, 천한 것들이 쓰는 글자로, 무식하고 막돼먹은 글자로, 하여 이 글자가 조선을 혼란으로 빠뜨리고 유학을 망치는 것을 최대한으로 늦출 수 있도록....."

 '뿌리깊은 나무'에서 훈민정음이 민중에게 퍼지자 세종의 한글창제를 반대한 밀본이 말한 대사이다. 유학이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건국이념인 성리학이 훈민정음으로 인해 망쳐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대부들은 성리학이 망쳐지면 선비의 나라라고 자부해왔던 양반위주의 신분질서가 어지러워질까 두려워해 우리글을 천시하는 풍조를 만들어냈다.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을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중국을 섬기고, 중국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세종실록'(제103권, 16~21장),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소중화의식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집현전 학자에게서도 뿌리깊게 박혀진 사상이다. 번듯한 '조선'이라는 나라 안에서 양반들은 '소중화'를 외치고 중국에게 조공을 받치며 스스로를 중국의 속민으로 낮췄다. 당시 조선은 중국 명나라에 대한 국가적 자세를 '근사대지예(謹事大之禮)', 즉 '큰일을 삼가는 예의자세'라고 말할 정도로 주체성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조선만의 글자는 소중화에 반(反)하는 행위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해왔다.



여기서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그들 사대부의 자세가 지금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나라의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각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국 대신 미국이라는 나라를 향한 또 다른 사대주의 말이다. 점점 늘어가는 미국 유학, 영어교육, 토익열풍 등에서 보여지듯,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반듯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 한다. 영어 점수가 높을수록, 영어회화가 잘 될수록 좋은 직장을 갖고,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모습은 조선시대 한자를 알아 관직에 진출하는 양반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의 영어 발음을 위해 ‘혀 수술’까지 하는 ‘영어 조기교육 광풍’이 불기도 했다. 그 영어의 바람은 '미국 유학', '영어 캠프', 'TOEIC', 'TEPS' 등 영어에 관련된 다양한 방면으로 확산되고 있다. 영어 공용화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고, 영어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도 끊임없이 쏟아진다. TV에 나오는 전문가들 역시 번듯한 우리말 대신 영어를 사용하고, 길거리에 설치된 광고도 외국어로 가득하다.

제 뜻을 시러 펴디 몯할노미 하니라/ 내 이를 윙(爲)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 자(字)를맹가노니 / 사람마다 하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뼌하킈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마침내 제 뜻을 알리지 못하는 일이 많다./ 내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 쉽게 익혀 매일 써서 편안케 하고자 할 따람이니라.)

글을 몰라 죽어가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집현전 학자들과 밤낮을 새가며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은 또 다른 사대주의가 이 땅에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을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미 군정 시기는 우리말이 아닌 다른 언어가 우대받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한글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언어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하나 모어(母語)인 한글만큼 중요하진 않다. 언어를 잃으면 그 언어를 가진 나라의 정신 또한 잃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