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화 된 대한민국’. 우리가 흔히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말할 때 이 명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명제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획일화되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은 타인이 자신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인종이나 머리카락 색 등 외양적 부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며, 생활 방식도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의 타인이 우리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의 식문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종이나 생김새의 차이가 없는 한국에서는 다수의 편의라는 이유로 소수가 불편함을 감수 해야할 일이 생긴다.

  

필자가 미국에 있었을 때 받은 가장 당혹스러웠던 질문 중 하나가 “넌 네 아메리카노에 뭐뭐 섞을 때가 가장 좋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친구들은 무엇을 먹을 때마다 햄버거 패티가 어느 정도 구워졌을 때가 제일 맛있다 생각하느냐 햄버거에 토마토와 양상추가 어느 정도 들어가야 가장 맛있다고 느끼느냐 같은 음식의 기호에 대해서 자주 물어봤다. 그런 질문들을 받으면 필자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Well well done?” 이후로 미국인들이 스타벅스에서, 식당에서 주문할 때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결론은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미국인들은 주문을 할 때 자연스럽게 토를 단다였다. 꽤 긴 개별 주문을 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한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오니, 한국 식당의 음식 주문과 메뉴가 획일화 되어 있다고 느꼈다. 이 사실은 필자의 어머니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고혈압이 심하다는 주의를 받은 후 식생활에 각별하게 신경을 쓴다. 그 이후 어머니는 그토록 좋아하던 외식을 하지 않고, 지인을 만날 때에도 식당 선택에 신중을 기울인다. 식당 메뉴들은 간이 많이 된 짜고 매운 음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직장 생활 중 단체회식을 해야 할 상황이 불편하다고 토로하셨다.

 

 우리가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대체로 주문은 한 두 마디에서 끝난다. 만약 찌개집에서 “소금은 아예 넣지 말아주시고 된장찌개를 조금 묽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종업원은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고,”제가 고혈압 때문에 소금 섭취를 조심해야 돼서요.” 라고 멋쩍게 부연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사소할지도 모르나, 이러한 에피소드는 우리가 자신과 타인의 차이점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별 주문은 국민의 건강과 다문화 사회와 같은 사회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삼성서울병원의 식품 알레르기 공식 사이트는 의사의 진단으로 식품 알레르기 증상을 판정 받은 초 중고생은 전국적으로 5%이며,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국내인구의10명 중 1명이라는 고혈압 환자들과 까다로운 식이 요법을 요하는 각종 성인병 환자의 증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약 59만 명의 외국인 거주민과 늘어가는 외국인 관광객 수는 우리의 식문화가 변화 해야 할 또 다른 이유이다. , 음식에 들어간 음식 재료를 메뉴 판에 기입해 알레르기 환자들이나 기타 소수의 취향을 가진 이들이 안심하고 주문을 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손님이 개별 주문을 할 수 있도록 메뉴를 세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 음식은 한꺼번에 조리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개별 주문이 불가능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주방장에게 부탁을 하고그 부탁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떠나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서울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식품알레르기 빈도를 나타낸 표. (출처: http://www.foodallergy.or.kr)

           

  요즘엔 많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이런 개별 주문이 일상화 되어 있고, 사람들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일률적인 메뉴와 일률적인 주문을 받고 있다. 내가 계란 반숙을 싫어하기에, 계란을 조금 더 익혀달라는 주문을 당당하게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소수의 취향과 요구를 소홀히 하지 않는 자세는 거창한 부분뿐 아니라, 이런 작은 영역에서도 적용된다. 익명의 타인이 자신과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다원화 사회로 가는 첫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