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연봉 논란’은 진보세력이 문화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정명훈에게 20억이라는 연봉이 합당한지, 또는 시민의 세금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쓰이고 있는지는 논의가 필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정명훈을 비난하는 진보세력의 논리는 대체로 정명훈 개인에 대한 공격에 치중했기에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정명훈이 이명박 대통령, 오세훈 시장과 정치적 성향이 맞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돈을 받은 것이라며 대중의 반감을 교묘히 부추기는 식이었다. 또한 정명훈의 능력을 폄훼하면서 “세계4대 오케스트라 지휘자명단에 없다.”(김상수)는 팩트가 어긋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대략 10명 정도의 세계적 지휘자를 선택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정명훈은 어느 정도의 순서에 들 수 있을지?” (김갑수) 라며 아무런 기준도 없이 예술가 등수 매기기 따위나 하고 있었다.

정명훈은 6 년간 서울시향을 안정화하면서 서울시향의 ‘문화적 가치’를 향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예술 감독으로서의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중이다. 표면적으로도 서울시향의 유료관객 증대나 공연 수입 증가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능력이 입증되고 있다. 정명훈의 정치적 성향과 음악적 역량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문화는 정치에 종속된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지휘자의 정치적 성향, 또는 특정 정치인 밑에서 고액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진보 세력은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들마저 그들만의 잣대로 평가하고, 규정지으려고 한다. 오만한 태도다.

 


클래식은 상위층만이 듣는 음악인가?

물론 정명훈에 대한 공격에는 “클래식은 1%을 위한 음악이다.” 라는 일종의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클래식 공연이 늘어나고, 대중들이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클래식은 상위층만 즐기는 음악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고착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세력은 정명훈에 대한 비난이 ‘부르주아를 향한 프롤레티리아’의 투쟁으로 보여지기를 원한 것 같다. 탁현민이 트위터에 남긴 말은 진보세력이 클래식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명훈의 예술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세종문화회관을 지나는 저 종종걸음의 대중에게 있지 않음은 나는 알겠다. 마에스트로는 무슨 개뿔. 대체, 고작해야 한 시절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음악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조낸 참담한 음악교육... 그렇다면 그 시절 아프리카 가나나 짐바브웨에서 불렸던 음악도 클래식이라고 해야지”
 

탁현민은 서구예술의 전통 자체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고 있으며, 다수의 대중이 즐기지 않는 예술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듯 말하고 있다. 진보세력 내에서 '문화평론가' 내지는 '문화컨텐츠 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의 예술관이 이 정도라면 비참할 따름이다. 클래식은 현대 대중음악의 중요한 음악적 기반이 되고 있으며, 클래식으로 일컫는 서구 고전음악은 몇 백년을 견뎌오면서 고유의 예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가치를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대중과 동떨어진 음악이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지 않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줄 필요가 없는 것일까? 오히려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상위계층의 음악이라고 여기는 클래식을 대중들도 즐길 수 있게 ‘음악 복지’, '문화 복지' 의 차원에서 서울시향에 더욱 투자하는 것이다. 부자들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저렴하거나 또는 무료로 ‘좋은 클래식 연주’를 들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은 시장경쟁을 통하여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좋은 클래식 연주는 시장경쟁 속에서 나오기 힘들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예술에 지원해주는 문화 정책이 실현돼야 한다. 그래야 상품으로서의 예술만이 득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클래식뿐만 아니라, 대중이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예술적 가치를 가진 음악들, 즉 국악이나 인디음악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 무조건적인 ‘시장 경쟁’을 지양하고, 문화의 획일화를 막는 것은 진보세력이 평소에 추구해오던 일들이 아니었나. 그런데 정작 진보세력은 클래식을 고급계층들이 향유해왔던 음악으로 치부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반감만 부추기고 있다.



민중가요도 무시하면서…
 

진보세력은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들이 즐겨 부르던 음악인 민중가요는 아예 그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 얼마 전 민중의소리 산하 계열사인 미디어보프가 저작권자의 동의도 받지 않고, 전국농협노조에 민중가요 편집음반을 제작해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일이 있었다. 주문자인 전국농협노조가 저작권에 대해서 문의하자, 미디어보프 쪽에서는 ‘관행이라 상관없다’며 저작권은 전혀 염두하지 않고 편집음반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결국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5일 성명서를 내고 미디어보프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성명서에 의하면 편집 앨범에는 최근 히트곡이나, 현재 미발표곡이며 음반 발매를 앞둔 곡까지 들어있다고 한다. 민중음악인들의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미디어 보프 에서는 실비만 받고 이 앨범을 만들었으며, 앨범은 전국농협조합 노조원에게 무료로 배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리 목적이 없을지라도, 저작권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있었더라면 창작자들에게 동의는 얻었어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음악인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노래패 ‘꽃다지’의 민정연 대표는 레디앙 글에서 “저작권을 침해당해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우리의 노래가 진보운동에 복무해야 하는 도구쯤으로만 취급받는다는 생각에 분노했다.”는 말로 음악인들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를 설명했다.

노래패 '꽃다지' 공연 ⓒ 꽃다지

 

음악인들은 “창작자의 의도가 실종되거나, 음악인들의 경제기반이 악화되는 등의 문제점 때문에 2000년도에 민주노총 문화국과 문화단체들의 간담회를 통해 노동조합에서 임의로 편집음반을 제작하지 않기로 결의 했었다.” 고 말한다. 그 이후 음악인들은 편집 음반을 만든다고 소식이 들리면 2000년도의 간담회 결과를 이야기 하면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디어보프처럼 아무런 양해도 없이 편집음반을 만들면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 대한 미디어보프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음악인들이 민중의 소리에 공식사과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후, 두 달이 지나서야 “편집 음반은 미디어보프가 만들었다.” 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화가 난 음악인들이 성명서를 낸 뒤에야 미디어보프는 공식 사과를 했다고 한다. 

과거 민중의소리는 자신들의 동영상을 무단으로 사용한 조선일보에 대해 고소했던 일도 있었다. 자신들의 저작권은 철저히 보호하면서 정작 음악인들의 저작권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황당할 뿐이다. 또한 문제가 제기된 후 이들이 공식사과를 즉각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안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세력일수록 문화예술을 존중해야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의 차이가 지배구조를 고착화시키고, 계급을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음악, 영화, 책, 그림 등이 ‘객관화된 문화자본’으로서 문화자본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부르디외의 말에 따르자면 만약 이러한 문화자본이 공평하게 분배가 안 되고, 경제격차에 따라서 접하게 되는 문화예술 컨텐츠(교육적인 측면도 포함한)의 수준과 양이 차이 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불평등은, 국가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양질의 문화를 똑같이 제공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진보세력이 문화예산을 늘리자고 주장하면서, ‘문화 복지’의 필요성을 역설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지점이다. 그런데 정작 진보세력은 '문화 복지' 주장은 고사하고 예술을 투쟁의 대상 (클래식) 이나 투쟁의 도구(민중가요)로 삼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오히려 보수신문인 중앙일보에서 먼저 문화예술의 가치를 강조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7일 오피니언에서 “문화는 밥을 먹여준다 재난의 상처도 치유한다.” 는 주제의 글을 싣는다. “지진 피해를 입은 가운데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니 ‘노래를 듣고 싶다’는 요청이 쏟아지더라. 역시 문화는 삶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일본 문화청 장관의 말을 빌려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지진으로 다친 마음 어루만지고, 범죄자가 될 뻔했던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도 문화의 힘이다.” 라며 문화 예산을 더 늘리자는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보수가 ‘문화 복지’를 강조하는데, 진보는 음악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상황이다. 삶을 성찰하게 하며, 때로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문화예술이 현대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진보세력은 한강르네상스 같은 겉치장만 요란한 문화가 아닌, 대중이 감동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양질의 문화예술 컨텐츠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아가 그것을 ‘보편적 문화 복지’ 차원에서 모든 이에게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