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신상 보호를 위해 학교명과 이름은 익명으로 합니다.


S대학교 언론학과에 재학 중인 J씨는 학교 입학 전 참여한 새내기 배움터(일명 ‘새터’)에서 선배의 부름을 받고 달려 나간 적이 있다. 선배들의 어두운 표정, 일사분란하게 한 줄로 서는 새내기 동기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알 수 없는 상황에 J씨는 어리둥절했지만 뭐라 말 할 수 없었고 머릿속으로만 무슨 일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시무시한 상황이 펼쳐질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한 선배의 말이 이어졌다. J씨는 아니었지만 다른 동기를 향한 말이었다. “넌 선배 말이 말 같지 않냐. 주의 줬어, 안줬어. 이 미친XX가. 그리고 나머지들도 문제야. 얘가 잘못하면 니들이 서로서로 주의를 줬어야지. 이건 얘 하나의 잘못이 아니라 너희 모두의 잘못이야.” 순간 J씨는 당황했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다른 선배들도 그 동기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줬다. 어떤 선배는 욕을 하며 그 동기를 주먹으로 때리려고 까지 했다. J씨는 선배들을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비난의 화살이 자신한테로 꽃힐 분위기었다. 결국 30분정도 지난 후 상황은 종료됐고 동기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신입생이 선배들 앞에서 욕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선배에게 욕을 한 건 아니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정도였다. 여기서 J씨는 의문이 들었다. 선배들 앞에서 혼잣말로 욕을 한 게 과연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신입생 전체를 불러 모을 만큼 큰 잘못인가? 잘못 안 한 나머지 학생들은 왜 불려가야 했는가? 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같은 과에 다니는 L(20)씨는 “선배가 ‘너희 모두의 잘못이야‘라고 말할 때 솔직히 기분이 좀 나빴어요. 아무리 봐도 저는 잘못이 없는데 왜 그런 상황을 겪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돼요." 라고 말했다.



결국 이러한 기합의 과정,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로 이어지는 과정은 현대판 전체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집단권력이 개인의 생활을 간섭·통제하는 바로 그 전체주의(totalitarianism)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권자(선배)의 권력은 아무 잘못 없는 개인(후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잘못을 전체로 미루어 후배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압박당한 후배들은 자기 잘못이 아닌 줄 알지만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선배들은 이러한 후배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애들 표정을 보니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군. 이런 일로 다시 전체를 위협하는 후배는 없겠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과장이 조금 섞였지만 이런 식으로 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더 문제인 것은 이 상황이 되물림 된다는 데에 있다. 기합을 받았던 후배가 몇 년 후 선배가 돼서 기합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로 말리지 않는 방관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한 대학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한 정효정(29)씨는 이 같은 상황을 겪었다고 답했다. “대학교 입학 후에 사체과라 그런지 기합도 많고 복장규제도 심했어요. 한 번은 머리 박으면서 기합을 받아서 두피가 다 벗겨진 적도 있어요. 부당하다고도 생각했지만 다 가만히 있으니까 저도 참았죠.  그렇게 2, 3학년이 되고 저희 학번이 선배가 됐어요. 그런데 그 때 다른 동기들이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기합을 주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신입생일 때 기합 준다고 말 많던 동기들이 기합을 주고 있으니까 어이가 없었죠." 그렇다면 그 상황을 말렸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데 부당해도 1학년이면 당연히 겪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때 저는 잘못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종속(從屬) : 자주성이 없이 주가 되는 것에 딸려 붙음

학기 초 이렇게 기합을 받은 후배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배들에게 종속된다. 마치 군대에서 얼차려를 받은 후임이 선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도 학생들은 선배의 입장을 우선시하게 된다. 사소하게는 만날 시간이나 장소를 고르는 것부터 크게는 중대한 사안을 고르는 문제까지, 후배들은 의견을 내지도 못한 채 선배들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른다. 물론, ‘종속’이란 단어가 거칠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선배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 ‘종속’이란 말이 참 잘 어울린다. 훗날 13, 14학번들이 현재 12학번에게 종속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