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정점을 친 부동산 투기, 재테크 열풍은 오늘날 하우스 푸어 2백만, 가계부채 1천조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부채도 자산이라던 시대를 뒤로 하고 가계부채 다이어트로 화두가 옮겨간 지금, 빠듯한 가처분소득에 허덕이는 각 가계가 가장 먼저 감량대상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문화소비다. 한국의 문화산업은 고단하다. 출판계 역시 끝없는 불황의 터널에서 길을 잃은 지 오래다. 퇴출 경계선에 놓인 영세 자본 위주로 편성된 출판계에서, 출판 노동자의 삶은 산업의 부침에 그대로 노출된다. 신입 편집자들은 출판계의 깊은 모순을 빠르게 깨달아가며, 상처도 입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야만적인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뻔한 연대 뿐이라고 믿는다. 이에, 평균 재직기간이 1년이 되지 않는 젊은 출판 편집자들이 모였다. 

(인맥의 착종이 심하고 소문의 전파가 빠른 출판계 특성상, 또한 자사 직원들이 자사 외부의 일에 관심 갖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영진을 감안해 아래 언급되는 출판사명과 편집자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한다.)

 

'편집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 두 권 


신입 편집자 모임을 주창한 갑 출판사 A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출판 일을 꿈꿨다. 대학시절에도 꾸준히 업계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인턴 경험도 했다. 인턴 일은 마무리가 거칠게 끝났다. 출판 자본은 스스로의 영세함을 변명삼아 출판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전가한다. 그럼에도 A씨는 편집자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정규직에 취직했다. 그러나 소규모 출판사에선 신입 편집자를 위한 체계적인 교육 훈련 기회가 전무했다. 한국에서 유일한 출판 교육 기관인 서울 북 인스티튜트의 강의를 자비로 들었지만, 십여년 전부터 업계 동향에 밝았던 그에겐 십년 째 강사도 교육 내용도 동어반복일 뿐인 강의에 만족할 수 없었다. 회사에도 기관에도 의지할 수 없다면 같은 처지의 신입 편집자들끼리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을 출판사 B씨는 편집자가 된지 겨우 3개월차다. 그는 한국의 양대 출판인 양성 기관이라 불리는 서울 북 인스티튜트의 도움도, 한겨레 출판학교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출판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가 다니는 회사 역시 신입을 가르칠 여력은 없었다. 모든 것이 맨땅에 헤딩인 식이었다. 그의 고민을 A씨도 거든다. “요새 회사들은, 꼭 출판사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사람을 가르쳐 쓰기 보다는 이미 완성된 신입을 원한다.” 소규모 출판사의 경우 자본 부족으로 출간 스케줄이 느슨하게 되기 일쑤다. 그러나 대형 출판사의 경우 출간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업무가 자연히 분화되고, 별도의 트레이닝 과정이 없이도 업무의 난이도에 따라 차츰 일을 익혀나가며 훈련받을 수 있다. 또한 소규모 출판사에서는 불가피하게 1인 다역이 요구되므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며 숙련도를 쌓을 수 없다. 신입 편집자 모임을 구상하기 전 A씨는 타사의 미들급 편집자들에게 노하우와 정보 교환을 위한 주니어들의 연대를 지원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하지만 중진 편집자들은 그의 절박함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C씨는 출판계 경력이 1년 반으로, 모임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됐다. 그러나 일 년을 온전히 채운 회사는 한 곳에 불과하다. 가장 최근에 프리랜서로 채용된 회사는 한 달만에 갑작스레 말을 바꾸어 C씨를 해고했다. 현재 실업 상태인 C씨는 출판계의 부당한 관행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봤다며, 자신이 계속 출판계에 남을 수 있을까 회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C씨는 나이 서른 전에 정착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출판계의 항구적인 고용불안과 불안정한 소득흐름은 그로 하여금 편집자로서의 미래를 회의하게 만든다.

C씨는 재직 중엔 이렇게 동료 편집자들끼리 모인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일상화된 야근과 잔업은 출판 노동의 벌거벗은 현실이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일하고 집에 일을 가지고 들어가던 C씨는 일에 치여 네트워크를 쌓을 엄두조차 못 냈다. 소규모 출판사들에 신입으로 들어가면, 일에 대한 고민과 부담을 나눌 또래 동료는 전무했다. “외딴 섬에 표류하는 느낌이에요.” C씨는 채용할 때는 온갖 조건을 붙여 까다롭게 굴다가도 너무 쉽게 사람을 해고하는 출판사들을 비난했다. “이력서에 의무로 신간 계획서를 첨부하라는 회사들이 많죠. 회사들은 그 신간 계획서를 무상으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소규모 출판사는 종종 사장의 소왕국으로 변질된다. C씨가 유일하게 1년간 버틴 회사에서, C씨의 후배들은 사장의 변덕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이유들로 허다하게 해고당했다. 이런 풍토에서는 편집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윗선과 맺는 관계 따위의 부차적인 부분이 직업 수명을 늘리는 비결이 된다. “해고가 잦다보니, 결국 오래 남는 사람이 승자라는 인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괜찮은 사람들인지는 의문이네요.”

출판 노동자들의 모임은 기존에도 있었다. 출판사 노동자 협의회가 그것이다. 신입과 경력의 비율이 8:2로, 이 모임 역시 신입 편집자 모임에 가깝다. 출판사 노동자 협의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스터디를 꾸린지 오래됐는데, 주로 교정교열에 치우쳐 있다. A씨는 신입 편집자들이 함께 나눌 토론의 주제를, 기획에서부터 마케팅을 아우르는 출판 전반으로 확장하고 싶어한다.

A씨가 꾸린 작은 스터디가 탄력을 받으면, 출판사 노동자 협의회와도 교류하여 네트워크를 살찌울 계획이다. 이곳의 편집자들이 시작한 스터디는 단기적인 목표, 한방의 성공에만 치중하는 토익 스터디나 취업 스터디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이렇게 함께 성장하여 언젠가 우리 멤버들이 미들급이 되면, 그때는 더 큰 판을 벌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직 이름도 없는 이 모임은, 초보 편집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인 교정교열부터 시작해 차츰 기획, 출판역사, 마케팅과 전자책 산업까지 논의의 폭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이들에게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져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