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드라마 ‘각시탈’에서 일본군에게 잡혀온 독립군들이 법정에서 당당히 독립군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짠하다. ‘아아 독립군들은 저 잔혹한 일본놈들 앞에서 어떻게 독립군가를 당당히 부를까. 저렇게 훌륭한 독립군들을 잡아넣다니, 이 나쁜 일본놈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각시탈’을 타고 민족주의가 다시 한 번 tv에 나타났다. ‘각시탈’의 곳곳에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존재하며,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에게 반일감정을 싹트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예컨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주인공 이강토에게 “니 놈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근본은 조선사람이야.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바뀔 성 싶으냐!”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마음이 브라운관을 타고 우리에게 절절히 전해진다. 일본순사들이 조선민중을 시도 때도 없이 핍박할 때는 마치 우리 가족이 핍박당하는 것 마냥 슬프다. 종로경찰서 경부 기무라 켄지가 조선민중의 영웅인 각시탈에게 최후를 맞을 때 우리는 ‘그렇지!’하는 통쾌함을 느낀다. 이처럼 ‘각시탈’을 보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 일본을 향해 분노를 갖게 만든다.



물론 필자 또한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잔혹한 일본인의 모습이 당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억압에 항거하신 그 분들께 존경을 표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이런 통쾌하고 적나라한 드라마를 비판하는가. 답은 ‘민족주의’에 있다. 

민족주의는 쉽게 말해, ‘우리민족끼리!’라고 할 수 있으며, 조금 더 축소된 개념으로는 ‘우리지역끼리!’를 외치는 지역주의를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좀 더 쉽게 알기 위해, 일단 범위가 작은 지역주의부터 살펴보자. 지역주의의 장점으로는 지역을 기반으로 무언가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의식 덕분에 선의의 경쟁을 불러일으켜 지역별 특성화를 장려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지역주의는 지역이기주의와 지역감정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예컨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갈등만 보아도 지역주의가 잘못 이행되었을 시에 미칠 막대한 파장을 예상할 수 있다.

경향신문

안타까운 것은 지역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지역이기주의나 지역감정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집단에 소속되면, 내집단의 여론 혹은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기 어려워지며, 그것이 석연치 않을 경우에도 여론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인 개인은 있어도, 도덕적인 집단은 없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도덕적 집단동조의 속성이 외집단을 부정적으로 일반화하려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전라도(혹은 경상도)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더라.’는 말이 나오면, 그 집단 구성원의 대부분이 ‘그럼 그렇지, 그놈들이 다 그래’라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지역주의의 문제점은, 지역주의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는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경우의 문제점과 일치한다. 간단한 예로, ‘일본인을 쪽바리, 중국인을 짱개, 미국인은 양키’라고 말하는 것, 혹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쪽바리/짱개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들을 부정적으로 일반화하고, 희화화하여 깎아내리는 것인가. 필자는 그것이 극단적 민족주의의 폐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 또한 기본적으로 특정집단의 연대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비교적 내집단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혹은 작용했던) 외집단을 고립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이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특정집단의 연대의식이 기본바탕이 되는 생각들이 극단적으로 변질될 경우, 기타 집단과의 화합과 평화가 위태롭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지역들이 심각한 지역갈등 없이 화합을 이루어야 하듯, 인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가가 되었든 민족이 되었든 함께 화합하고 공존해야만 한다. 우리가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을 보면서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한국과 일본의 민족감정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 또한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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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각시탈로 돌아와 보자. 조선민족의 영웅인 각시탈이 일본‘놈’들을 때려잡는 동안 우리의 반일감정은 무럭무럭 싹튼다. 일본‘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규탄해야할 대상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비인간적인 행위를 했던 사람들과, 아직까지도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배짱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를 매개로 ‘일본 개새끼론’을 펼치기에는 우리 스스로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슬픈 것은, 우리가 머리로는 모든 일본인을 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본’에 대한 기억을 반추해보자. 좋았던 기억보다는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강하고 생생할 것이다. 물론 그 이유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교육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답은 어릴 적부터 봐왔던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독한 일본인들과, 이를 보면서 일본‘놈’을 욕하는 사람들이다.

각시탈 또한 ‘반일감정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심을 일으키는 드라마다.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가 일본의 만행을 드러내는 것이든, 그저 흥행요소로서 일제강점기를 넣은 것이든, 더 이상 드라마나 영화의 컨텐츠로서 일제강점기를 부각시키는 것은 자제해야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특수성은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서로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자연스럽게 고착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만행에 대해 우리가 손을 놓고 눈을 감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다만 일본의 만행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함이라면, 이는 드라마/영화 등의 컨텐츠로 사용하는 것보다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나 기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저 반일감정만 앞세워서는 그들을 논리적으로 이길 수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흥미진진한 각시탈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