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광기다. 모든 상황들을 평소와는 다르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상에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와, 각자의 관심사와,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각자의 삶을 산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에 우리 대부분은 한국 선수의 선전을 바라며, 한국 대표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화면 앞에 앉아 마음을 졸였다. 새벽까지 경기를 보고, 또 매일 경기 결과와 출전 선수들에 대한 기사를 소비하면서, 대표 선수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양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인 양 일희일비했다.

끝까지 불편부당한 객관성의 이성을 지켜야할 것 같은 언론이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다. 오히려 언론은 올림픽의 인기에 편승해 광기를 더욱 키우는 데 일조했다. 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12일 경향신문 옴부즈만 지면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시작된 부적절한 스포츠 저널리즘의 관행이 2012년 런던올림픽 보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간지에서 당일 가장 중요한 기사를 배치하는 1면은 올림픽 소식으로 채워져 정작 중요한 문제들이 뒤로 밀려났다. 또한 언론은 한국대표에게만 많은 관심을 보이며 ‘민족주의적’인 보도를 자행했다. 여자 운동선수의 소식을 보도할 때 ‘운동’보다 ‘외모’를 우선에 두는 선정적 보도 관행도 여전했다.


추측성 오심 논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을 잊었다

런던올림픽 초반에는 연일 오심 논란이 있었다. 실격 번복(수영 박태환), 판정 번복(유도 조준호), 1초 사건(펜싱 신아람)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정말로 ‘억울한’ 오심 사태였다. 하지만 이후, 객관적으로 오심으로 볼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나라가 오심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식의 중계와 보도, 해석들이 넘쳐나는 모습은 또 하나의 광기였다.

유도와 태권도 종목 중계에서 캐스터와 해설들은 ‘우리 선수가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니, 상대 선수에게 지도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관적인 언급을 반복했다. (해당 종목에서는 심판이 적극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는 선수에게 지도를 줄 수 있고, 지도가 누적되면 점수 획득과 연결된다.) 레슬링 종목에서 최규진, 정지현 선수가 연일 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패배하며 탈락하자, 언론에는 ‘아제르바이잔이 레슬링 연맹에 수백억대의 자금을 제공해 심판들이 편파 판정을 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진실인 양 보도되기도 했다. 손연재 선수가 출전한 리듬체조 경기에서 러시아 선수들이 실수에도 불구하고 손연재 선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자, 리듬체조의 채점 룰을 확인하지도 않고 러시아 선수들이 편파 판정의 특혜를 받는다는 얘기도 나왔다. 체조 경기는 높은 기술을 가진 선수가 실수를 몇 개 저지르더라도 낮은 기술을 가진 선수가 실수 없이 연기를 했을 때보다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 연합뉴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팔이 안으로 굽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을 가진 속담이다. 우리는 올림픽 기간 동안 이것을 완전히 잊었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판정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은 완전히 무시한 채, 모든 상황을 ‘제 논에 물 대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약소국보다는 강대국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오심은 ‘약소국의 설움’으로 포장됐다. 세계 5위의 성적을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스포츠 강대국'이라 평하며 스포츠 외교력, 과감한 엘리트 스포츠 투자 등을 칭송하면서도 불리한 상황에서는 약소국 행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오심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나오면 심판의 국적과 심판의 개인 SNS까지 모두 ‘털어’ 냈다. 올림픽이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결정체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양학선 신화, ‘복지 국가에의 의지’를 잊었다

도마의 양학선 선수는 우리나라 체조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양학선 선수는 경기 전에는 스타트 밸류 7.4의 고난이도 기술 ‘양1’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금메달을 따고 나자, 양학선 선수의 ‘가난한 배경’이 기술과 실력을 밀어냈다. 언론은 양학선 선수의 가난한 성장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부모가 여전히 살고 있다는 ‘비닐하우스 집’에 방문해 그의 가난함을 부각시켰다. 사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양학선 선수가 경기 종료 후 가장 먹고 싶은 것으로 ‘너구리’ 라면을 꼽자 ‘너구리’를 만든 농심 측은 양학선 선수에게 ‘너구리 평생 기증’을 약속했고, 건설 회사들은 앞 다퉈 집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일견 훈훈한 모습이다.

그러나 실력 대신 가난함이 부각되고, 그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삐뚤어지지 않고 노력한 고운 심성이 부각된 순간 양학선은 금메달리스트를 넘어 ‘신화’가 되어버렸다. 그는 가난해도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가난함은 그의 성공을 부각시켜주는 하나의 좋은 배경으로 다뤄졌다. 가난의 이유를 노력 부족, 불성실함에서 찾는 일각의 사람들, 세력들에게 ‘좋은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 세계일보

한 트위터리안(@milpislove)은 “양학선의 집을 지어주는 것은 금메달이 아니라 정부여야 한다”는 트윗을 작성했다. 가난한 배경을 뚫고 만들어 낸 인간 승리에 대부분의 ‘정신 나간’ 언론들이 초점을 맞춘 사이, 눈에 띄는 통찰이다. 양학선이 그런 가난한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그 환경이 극복되지 못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선거철만 되면 ‘복지’를 외치는 정치권, 언론, 시민들 모두가 양학선의 성공 앞에서 '복지에 대한 의지'라는 원래의 가치관을 잃어버렸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자 선수들에 대한 관심, 그녀들이 ‘운동선수임’을 잊었다

이번 올림픽에도 여전히 ‘얼짱 타령’은 계속됐다. 리듬체조의 손연재는 그 선두주자에 섰다. 한 매체에서 ‘올림픽 10대 미녀’로 선정된 사실은 올림픽 기간 내내 언론이 집중조명했고, 객관적으로는 ‘메달 후보’가 아닌 실력에도 불구하고 메달권이 아닌 또 다른 선수들에 비해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펜싱 여자 에페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김지연 선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세계 5위에 올라 있어 객관적으로 손연재 선수보다 메달 획득 확률이 높았지만, 4강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김지연 선수의 경기는 생중계조차 되지 않았다. 리듬체조라는 종목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공평하지 않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펜싱도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이기는 마찬가지 아니었나. ‘예쁜 선수’들을 앞뒤 안가리고 집중 조명해 스타로 만들려 한 언론들 탓에 손연재 선수는 불필요한 ‘욕’까지 함께 들어야 했다.

ⓒ 일간스포츠

손연재 선수뿐만이 아니다. 여자 배구 8강전에서 활약하며 ‘얼짱 배구 선수’로 집중 조명 받았던 황연주 선수는 과거 사진까지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김지연, 남현희, 신아람 등 여자 펜싱 선수들은 ‘미녀 검객’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사격 금메달리스트인 김장미 선수는 ‘4차원 소녀’의 이미지로 언론에서 끊임없이 소비됐다. 언론은 '세계 1위'를 가능하게 한 사격 훈련 과정, 담대함보다는 인터뷰 과정에서 드러난 김장미 선수의 엉뚱한 답변에 초점을 맞춰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스스로 소비했다. 언론의 전형적인 가십 유통 모습이다. 이러한 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여성 선수들에게 특히 집중되어 실력 대신 외모를 중심으로 다뤄지는 세태는 특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언론은, 그리고 그 언론을 아무렇지 않게 읽고 있는 우리들은 그녀들이 ‘운동선수임’을 잊어버린 것 아닐까. 언론이 남성을 보도할 때와 여성을 보도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에 대한 불편한 감수성을 팔아치웠던 것은 아닐까.


올림픽 기간, 우리는 광기 속에서 넘지 말았어야 했던 선들을 무의식중에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사실은 우리 사회, 언론과 엘리트 스포츠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고쳐야 할 모습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올림픽은 끝났다. 우리가 잊었던 것들, 잃었던 것들을 제자리로 돌이키기 위해서, 다음 올림픽에서는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