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김지하 시인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배후조종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로부터 39년 후인 2013년 재판부는 김지하에게 당시 재판의 과오를 사죄하며 무죄를 선고한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신은 김지하라는 이름 석 자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는가? 누군가는 그를 변절자라고 말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훌륭한 시인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몇몇은 '미쳤다'며 냉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그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도 온전하게 그를 설명할 수 없는 듯하다. 


김지하는 언제부터 자신의 사상을 공고히 빚어낸 것일까? 1991년은 김지하의 시세계에 전환점이 되었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해라. 그리고 그 굿판을 걷어치워라' 김지하는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한다. 이 칼럼을 통해 김지하는 사상에 대한 헌신과 분신으로 점철된 91년 분신 정국에서 '당신의 죽음은 헛된 것이며 당신의 생명은 그 어떤 사상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김지하는 이 칼럼을 필두로 투사적이었던 시세계를 넘어 생명 사상 쪽으로 좀 더 무게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서울의 봄'이 찾아온 이후 그가 쓴 대부분의 시는 우주론적 기원에서 생명을 찬미하는 시였다. 김지하의 대표작인 70년 5월 <사상계> 등에 발표했던 '오적'같은 시와 전혀 다른 시세계가 등장한 것이다. 

김지하는 이후 자신이 쓴 <조선일보>의 칼럼 '죽음의 굿판을...'의 편집 방향이 잘못됐다고 밝혔지만 이는 그의 개인적 회고로 여겨질 뿐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칼럼이 인용되고 이용되는 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단언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더 이상 덧붙일 필요성을 못 느낀 것 같다. 오해받았다고 주장하던 그는 자신의 사상을 여러 매체를 통해 거침없이 드러낸다. 무죄 판결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1월 8일 김지하는 CBS 라디오 방송에 나와 박근혜 당선인을 재차 지지하며 그녀가 감내했던 18년 동안의 고통이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는 비단 박근혜 당선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난날 그가 겪었던 고통 또한 그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시와 시인의 행적을 동일선에 놓고 일치하는지 굳이 비교해보아야 할까? 그는 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며 이미 역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그의 시세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삶의 행적을 그려내고 있다. 이를 나이가 듦에 따라 결국 사람은 보수화될 수 밖에 없다는 부동의 세대론으로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또한 유신 당시 고문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냉소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민청학련 사건처럼 그가 살아왔던 유신과 앞으로의 박근혜 정권 역시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사건을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됐다는 시인에게 무죄 판결 및 역사적 판단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말했듯이 이제 그의 앞에 새로운 의미로 남은 것은 보상금 뿐이다. 

다시 2013년이다. 김지하 시인은 여느 때처럼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무죄를 선고받고 법정에서 나오는 구부정한 늙은 시인을 기자들이 에워싼다. 보상금을 받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는 '저항' 시인 앞에서 자본주의의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독재라는 괴물과 싸우다 그는 끝끝내 괴물이 된 것일까.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무덤덤하다고 대답하는 늙은 시인의 목소리에 '숨죽여 울면서 쓴 민주주의여 만세!'의 감동이 예전 같지 않은 건 혼자만의 기분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