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패 수준이 다시 뒷걸음질 치는 모양새다. 경제수준은 아시아에서 최상위권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부패 척도는 여전히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홍콩 민간연구소 정치경제리스크컨설턴시(PERC)가 아시아 17개국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기업가 205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패체감도 조사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한국은 17개국 중 8위에 머무르며 쑥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중국, 필리핀, 미얀마, 캄보디아 등 전통적인 ‘부패 후진국’들엔 앞서지만,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맹주들에게는 뒤처진 성적을 거두며 체면을 구겼다. 이번 조사결과는 최근 10년 새 나온 부패진단서 가운데 최악의 성적이다.

경제수준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1인당 GDP 역시 2만 달러를 넘어간 상황에서 사회 청렴도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니 참으로 당혹스럽다. 그러나 요즘 이슈가 된 사건들을 보면 부패 수준이 떨어지고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할 수도 있다. 최근 불거진 ‘원전비리’는 한국수력원자력 공무원들이 원전부품 시험업체 등에서 뇌물을 받음으로써 촉발된 것이다. 국립대구과학관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직원 채용 비리, 김학의 전 법무차관 등이 연루된 ‘별장 성접대 비리’ 역시 공무원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여러 지자체에서 금품비리, 인사비리 등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어, 뉴스란에는 연일 비리 관련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떠오르는 법안이 지난 7월 초 조정안이 나온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이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2011년 제안한 이 법은 공무원이 100만 원 이상 금품을 받으면 직무관련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3년 이하 징역 또는 수수금품 5배 이하 벌금형으로 형사처벌토록 한 법이다. 그러나 지난 5월 처벌수위가 대폭 약화된 수정안이 국민권익위원회 측에 의해 법무부에 제출되면서 큰 논란이 되었다. 수정안은 형사처벌 소지를 아예 없애고 과태료 부과 정도로 처벌을 끝내겠다는 내용이다. 그나마 조정안에서 정홍원 국무총리가 ‘직무관련성이 있는 금품수수에 대해서는 대가성이 없어도 형사처벌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추가해 어느 정도 절충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직무관련성이 없는 금품수수에 대해선 받은 돈의 5배 이하 과태료만 물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공무원들의 부패를 근절하고자 한 원안의 취지가 훼손된 상태인 것이다.

공무원들의 부패 척결은 국가 이미지 확립과 사회 건전성 증대는 물론, 선진국 도약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오랜 기간 동안 공무원 사회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었고, 어느새 그 썩은 물을 당연하다는 듯 마시게 되었다. 이처럼 부패가 관습화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온갖 비리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쁜 관습을 뽑아내기 위해선 법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번 PERC의 조사 결과가 우리 사회에 부패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한다. 더불어 대대적으로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강력한 법안 마련을 요구한다. 김영란법의 원안을 살리는 것이 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