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엔 슬픈 전설이 하나 있다. 때는 2005년 봄,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김재박 現 KBO 경기운영 위원은 지난 해 우승팀답지 않게 초반부터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었다. 여러 주전 선수들의 이적과 부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시 못 할 전력으로 평가받던 현대 유니콘스에겐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여론은 10년 가까이 최강팀의 자리를 놓치지 않던 유니콘스가 포스트 시즌 진출에도 실패하는 건 아닌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김재박 위원은 당시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21세기 이후 야구 계에서 가장 정확한 ‘법칙’으로 인정 받고 있는 이론의 '서막'을 알린다.

“5월이 지나면 어차피 ‘내려갈 팀은 내려갈 것(Down Team is Down)’이다.
 

김재박 KBO 경기운영 위원. 논란의 주인공 답지 않게 평온한 표정이다.

김재박 위원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 한 마디가 야구판에 끼칠, 엄청난 나비효과를.

D.T.D의 시작, 그리고 '올해'는 다르다.

실제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5월 이후 순위권 싸움에서 부침을 겪다 결국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그러자 호사가들은 김재박 위원의 이 놀라운 통찰이 우연이 아닌 일종의 ‘과학적 법칙’이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롯데 자이언츠는 이후로도 2년을 더 롤러코스터와 같은 순위 변동을 경험하며 하위권으로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이렇게 이론의 초석(?)을 다져놓은 롯데 자이언츠는, 2008년 이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부임이후 3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하며 이 피하고 싶은 이론의 완성을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론을 매조지한 사람은 바로 이 이론의 주창자인 ‘김재박’ 위원이었다. (김재박 감독 부임 이후 LG트윈스 성적 -> 2007 : 5위, 2008년 : 8위, 2007년 : 7위, 하지만 시즌 초의 LG는 늘 상위권이었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D.T.D‘로 약칭되는, LG 트윈스(이하 LG) 팬들에게 있어선 지난 6년 간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던 ’전설‘의 시작이다.

선수와 감독이 한데 입을 모아 올해는 ‘정말’ 다를 것이라며, 장롱 안에 깊숙이 처박힌 채 근 10년 간 광합성을 못하고 있는 ‘유광잠바’를 기어코 다시 꼼지락거리게 만들던 시즌 초의 반짝 효과는 결국 늘 ‘희망고문’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새 LG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지 11년째에 접어들었다. (KBO 기록) 팬들은 늘 ‘올해’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늘 도돌이표처럼 실패로 이어졌다.

그러나 올해만큼은 LG가 4강 진출, 아니 그 이상을 기대해도 충분할 자격이 생겼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LG 트윈스가 ‘정말로’ 달라졌다는 말이다. 기록상으로도 분명히 드러나듯, 5월 이후 지속되고 있는 LG의 이 ‘크레이지 모드’는 (5월 26일 이후 37승 14패, 승률 0.725) 확실히 어떤 수사로도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무엇이 최약체 중에 최약체로 지목 받던 LG트윈스를 강팀으로 만들었을까. 시즌 초반에 있었던 삼성과의 트레이드나, FA를 통한 전력 보강만으론 이 상승세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큰 전력 보강은 아니었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이 놀라운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 ‘미스터리’한 팀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시즌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음미해 볼만 한 이유가 생긴다.

1. 끈끈한 팀워크

오랫동안 LG는 ‘자율야구’의 대명사와 같았다. 1994년,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이광환 감독은 기존의 집단, 희생의식 일변도였던 팀 운영체계에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자율야구의 개념을 도입해 소위 ‘신바람 야구’의 시작을 알렸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 해 LG는, 팀 역사상 최다승(81승) 및 최고 승률(0.643)을 기록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선발 전원(이상훈, 정삼흠, 김태원, 인현배)이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서용빈, 김재현, 유지현 이라는 걸출한 신인 3인방을 배출해내며 되는 팀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드러냈다.

그러나 1994년 이후 LG에게 ‘자율야구’는 곧 하나의 굴레를 의미 했다. 개인의 자율과 개성의 중시하는 자율야구는 개인의 빼어남을 강조 하는 데는 유리했으나, 반면에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워낙 개인 전력이 막강했던 시절인 만큼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팀 컬러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2002년 이후,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다는 말처럼 LG는 끊임없이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감독과 선수간의 불협화음이 하루를 멀다하고 언론을 통해 터져 나오고, 스타 의식에 취한 선수들이 개인플레이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LG는 ‘모래알 전력’ 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마저 얻게 된다.

하지만 올해의 LG에게선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다. 배려와 희생과 존중이 기반 된 끈끈한 팀워크가 선수들의 플레이와 감독/코치들의 말과 제스처에서 담뿍 묻어난다. 선발투수들은 위기상황에서 강판이 되는 와중에도 다른 투수들이 잘 막아줄 것이기 때문에 아쉽지 않다며 진심으로 팀을 신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타자 역시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상황에서 팀의 전략적 판단으로 대타가 들어서는 것에 대해 조금도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팀이 이긴다면 자신이 빠져도 상관없다며, 진심으로 자신을 대신해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를 응원한다.

이것이 단순히 립 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성적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취임 첫 해부터 LG 트윈스를 강력한 ‘팀 스피릿’이 살아 숨 쉬는 팀으로 재편할 것을 다짐하며 도약을 약속했던 김기태 감독이 팀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변화인 것이다.

2. 빼어난 집중력

LG의 여러 부진 이유들 중 주목할 만 한 하나는, 바로 결정적 상황에서의 빈타 능력이었다. 야구계를 떠도는 명언들 중에, 강팀이란 자고로 2사 이후에도 점수를 낼 줄 아는 팀이 진정한 강팀이다, 라는 말이 있다. 찬스 상황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강팀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집중력’의 문제와도 연관이 될 수 있다.

과거 LG는 괜찮은 출루율에도 불구하고 많은 잔루를 기록하는 ‘잔루 트윈스’였다. 개개인의 실력으로만 보았을 때, 도대체 LG가 왜 이런 성적을 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었다. 일례로 2009년 박용택이 수위타자(0.372)를 차지했을 당시 팀의 성적은 고작 7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LG는 박용택을 제외하고도 국민 외야수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타격, 수비 실력을 갖추고 있는 외야수 이진영, 5년 연속 3할 달성에 빛나는 특급 외야수 이택근, 교타와 장타, 수비력 겸비한 리그 최고의 3루수 정성훈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인업만 보자면 국가대표 라인업이 부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는 당해 시즌을 7위로 마쳤다. 아무리 타자들이 안타를 치고 나가도, 후속 타자들의 안타가 터지 않아 홈 베이스를 밟을 수 없으니, 말 그대로 안타는 안타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안타가 개인의 기록에야 보탬이 되겠지만, 팀 차원에서는 후속타의 불발로 득점이 나지 않는다면 유기성이 없는 단타의 연속은 다시 말하자면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득점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유기적인 플레이는 곧 높은 집중력에서 기인된다. LG는 지난 10년 간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올해의 LG는 소위 ‘진격의 LG’모드다. 좀처럼 찬스를 놓치는 법이 없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상대 팀을 물고 늘어지며 기어코 역전을 쟁취하고야 마는 높은 집중력을 보여준다. 이전 10년간 찾아볼 수 없었던 근성과 집중력의 DNA가, 조금씩 LG 선수들의 가슴 속에서 아로새겨지는 과정 중인 것이다. 

3. 적절한 신구조화

‘노인 한 명을 잃는다는 것은 도서관 한 채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격언이 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축적해놓은 고유한 지혜와 경험이 하릴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말이다. LG에는 리그 최고령 현역 선수인 류택현(43세)을 비롯해 주요 선수들의 평균 연령대가 36세일 정도로 베테랑이 많은 팀이다. 그래서 LG는 종종 ‘노인정 팀’이라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LG의 성적만 놓고 본다면, LG가 ‘도서관’을 태워버리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소위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LG트윈스 류택현 선수


맹활약은 비단 베테랑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에 못지않게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는 신인들(정의윤, 문선재, 김용의)의 등장은 적절한 신구조화와 함께 팀이 상위권을 유지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 3인방의 놀라운 활약은 마치 94년 LG의 황금기 시절 탄생했던 서용빈, 유지현, 김재현의 신인 3총사의 모습과 똑 닮아 있어, LG팬들로 하여금 향후 시즌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4. No fear, 즐기는 야구

이전의 LG는 잘 나가고 있을 때 오히려 더 불안해했던 팀이었다. 10년 가까이 팀을 지배해왔던 D.T.D 이론 탓에, 오히려 팬들이 시즌 초반부터 팀이 너무 치고 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있었다. 차라리 일찌감치 시즌을 포기하고 팀 리빌딩에나 주력하자는 자포자기성 발언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만큼, LG의 팬들과 선수단에게는 D.T.D란 호사가들의 그럴듯한 흰소리나 징크스 이상의 강력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그런 걱정을 접어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3위와의 많은 승차도 그렇지만(8월 13일 현재 3위와 5경기 차이 2위, 1위와는 승률 0.005리 차 2위), 무엇보다 선수단 사이에서 조금씩 ‘더 이상 순위 하락에 대해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싹 틔기 시작했고, 예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즐기는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작년부터 시작돼 올해에도 성공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선수와 코치진을 가릴 것 없이 팀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피 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한 일이다. 작년 역시 ‘뒷심’의 부족으로 인해 7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치긴 했지만, 결과와 상관 없이 초지일관 ‘고생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며 선수들을 다독여주던 감독과 덕아웃 노래방사건 처럼 작위적으로라도 팀 깊숙이 새겨진 ‘패배의 DNA'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선수/코치진의 노력이, 지금의 거침없는 상승세의 핵심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 6월 29일, LG 트윈스 덕아웃 노래방 당시. LG 트윈스는 이 다음 경기에서 바로 6연패를 탈출했다. ⓒ 스포츠 동아


No fear. 이제 LG 선수들은 더 이상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겁을 먹지 않는다. 그저 한 경기, 한 경기에 최선을 다하며 ‘진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아직, 시즌은 남아 있다.

이렇듯 성공적으로 시즌을 치르고 있는 LG지만, 경기는 아직 언제든지 순위를 뒤집힐(을) 수 있을 만큼 많이 남아 있다. 10년 간의 악몽이 톡톡히 반면교사로 작용한 점도 있고, 현재 LG의 분위기나 전력으로 보았을 때 이번에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때 메이저리그를 풍미했던 뉴욕 양키스의 포수 요기 베라의 명언 ‘It ain't over til it's over(끝날 때 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처럼, LG 역시 지금의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날 때 까지‘ 꾸준히 페넌트레이스를 치러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간계투진의 피로 누적 문제도 반드시 고민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지금은 다소 부진하지만, 시즌 초반 계투진 에이스의 역할을 수행했던 정현욱은 한국나이로 이제 36살이다. 예전처럼 불같은 강속구나 연투 능력을 발휘하기엔 체력적인 한계에 오는 시점이다. 물론 이동현이나 이상열, 김선규 등이 정현욱과 더불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당장 중간 계투진이 과부하로 붕괴 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경기 수가 남아 있고, 특히 올해의 무더위는 예년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베테랑 선수들의 체력안배는 향후 LG가 포스트 시즌 진출 이상의 목표를 상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아쉬운 대목은 2년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했던 ‘외국인 특급’ 주키치의 컨디션 난조이다. 지난 13일, 대구 삼성 전에서 37일 만에 2군에서 복귀한 주키치는 4이닝 10피안타 를 기록할 만큼 전혀 회복된 구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을 넘어 내친김에 페넌트레이스의 및 한국 시리즈의 잠룡(潛龍)으로 평가 받는 LG인 만큼 주키치의 부활은 ‘모 아니면 도’식으로 해결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주전 포수 현재윤 및 백업 최경철의 동시 부상과 신인들의 일시적인 부진 등, LG가 지금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문제는 위의 것을 차치하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LG의 상승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떠한 장애물이든지 끝끝내 극복하고야 마는 일종의 ‘초’집단적인 ‘힘’이 LG에게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날 때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보이지 않는 중력처럼 작용했던 D.T.D라는 ‘세계’를 깨고, LG는 이제 새로 태어나려 하고 있다. 초집단적인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생명의 탄생은 숭고하듯이, 하나의 세계를 깨려하는 생명의 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귀감을 준다. LG의 스토리가, 그래서 하나의 짠한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