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당신에게 해가 될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녀」 를 보았다. 칸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전도연의 최근작이라는 점, 1960년대에 제작되었던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는 점, ‘에로틱 서스펜스’라는 흥미로운 장르라는 점 등이 잘 어우러져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그 영화를 보았다. 자신만만하게 영화 포스터 한켠에 써 놓은 ‘2010년 가장 격렬한 화제작’이라는 문구 역시 이 영화에 주목할 수 있도록 한 몫을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일관적으로 느꼈던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아무리 주인공에게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결국은 ‘왠지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은’ 희망찬 분위기로 이야기를 맺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전반적으로 우울한 이 영화를 도저히 속 편하게 볼 수 없었다. 물론 임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러 가면서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않고 간 것은 내 잘못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문제 제기형 감독’이니, 굳이 시간을 들여 눈길을 주고 싶지 않은 ‘진실’도 묵묵히 지켜볼 수 있게끔 담담한 마음을 준비해 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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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에는 주요인물 4명이 등장한다. 주인공 은이, 집 주인 훈, 사모님 해라, 집사 병식(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자면 귀여움과 의미심장함을 동시에 갖춘 꼬마 나미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게집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던 은이가 상상을 초월하는 으리으리한 초상류층 집안에 들어가 하녀가 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 이때 은이가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글을 쓰기 전 보았던 리뷰들에서도 이 부분을 빼먹지 않고 지적했다. 놀랍도록 치밀하게 짜여진 틀에서 늘 하위에 머물며 상위 계층의 치다꺼리를 하는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길에 스스로 발을 들인 은이. 결국 앞으로 벌어질 비극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 본인이라는 걸 알려주는 걸까? 은이가 훈의 집으로 들어갈 만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게 이야기 흐름상 적절’하기 때문이라는 것 빼고는.


 에로틱 서스펜스라는 장르를 표방하는 영화는 하녀와 집주인의 관계맺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훈은 욕조를 닦고 있던 은이의 모습에 맥이 탁 풀렸던 것일까. 솔직히 그 시점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늘 왕으로 군림해 온 훈은 자신의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여겼을 테고, 원하는 시기 아무 때나 은이를 마음대로 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아이가 있고 쌍둥이까지 임신한 젊고 예쁜 부인을 놔두고 집안 시중 드는 여자와 끈적한 관계를 형성한다? 성적 관계를 맺게 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보는 내내 불편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라보는 아슬아슬함이랄까. 하지만 돌아보면 영화를 훑는 내 시선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조금 고단하긴 하지만 어찌됐건 평온하게 하녀 생활을 누리던 은이가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훈과 미묘하게 엮이면서부터다. 그런데 이 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속물적’이어서 놀랐다. 결국 쌍방 합의 하에 자게 된 건 맞지만 먼저 하녀의 방에 와서 일을 벌인 건 훈인데도, 자꾸 은이를 책하려 드는 모습이 역겨웠다. 훈의 가족들은 위선이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고고하고 기품 있는 척 활개를 치는데 그 모습에 대해서는 ‘저런 놈들은 원래 그런 거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먼저 유혹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아기까지 잃어버리는 은이를 동급으로 치부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 출처 : http://img.khan.co.kr/news/2010/05/05/20100506.01200122000002.01L.jpg 



 은이는 성실하게 하녀 역할을 다했다. 높은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픈데도 불평 않고 식사 시중을 들었고 뱃속의 쌍둥이들에게도 누구보다 애정을 보냈다. 나미에게도 따뜻하게 대했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며 본분을 잃지 않고 일을 열심히 했다. 다만 그 멀쩡한 모양새에 금이 간 것일 따름이다. 백 번 양보해 하녀가 된 것은 은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유혹의 손길을 건넨 것은 훈 아니었던가? 집안일을 전담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 이외의 '성 시중'까지 들게끔 만든 것은 훈인데도 나는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은이에게 비판의 화살을 당기기에 바빴다. 

 
 내가 스크린 바깥에 있는 제 3자라는 점을 감안하고 나더라도, 어떤 인물에 스스로를 투영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부터를 먼저 따지는 나를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예를 들어 해라가 아이를 낳으러 간 사이 은이가 해라의 욕조에서 신나게 전신욕을 즐기고 있는 장면을 보자. 은이의 행동이 훈 혹은 해라에게 들키지 않을까 가슴 졸였던 것은- 그게 '비상식적인 행동'이어서라기보다, '어떻게 감히 주인집에서 저렇게 굴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귓전을 때렸기 때문이다. 은이에게 투영했던 내 시선은 온전치 못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 특히 그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고 평가받을까만을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은이가 해라의 공작으로 아이를 잃게 되었을 때도, 그것을 순전히 비극으로 바라보지 않고 '슬프지만 어쨌든 네 잘못'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비정상적인 관계로 인해 의도치 않게 생긴 아이지만, 못된 수에 의해 한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보다- 그녀가 맞은 상황을 무서우리만치 합리화했다. 많은 발전을 거듭해 온 빛나는 21세기에는 계급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르짖었던 나인데, 실은 이미 사람들 간의 서열을 정해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기에 은이를 동정할 수 없는 걸까? 하녀가 그 난리(!)를 치고 눈 앞에서 목을 매 자살하더라도 훈의 가족은 끄덕도 안 하고 계속해서 허세를 부리며 잘 살 수 있다는 결론을, 실은 보지 않고도 예측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런 류의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지금까지 쭉 그래왔으니까- 하면서. 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불협화음을 수면 위로 끌어낸 은이가 '파장의 원인'이라고 몰았다, 끊임없이. 임신한 부인을 두고 하녀와 바람이 나 임신까지 시킨 훈의 잘못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은이의 뱃속 아기를 살해한 해라의 잘못도, 은이가 추락할 때 고의로 잡아주지 않았던 나미 할머니의 잘못도 금세 잊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잘난 사람들에게는 '토나와'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뱉은 게 고작이었다. 비겁한 나는 그녀가 이런 불안불안한 삶에서 빨리 도망쳐나오기만을 바랐다.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는 겉과 달리 위선적이고 지저분한 내면을 숨기고 있는 인물들을 보며 불편했던 나는, 나중에는 그보다 더 속물 같은 제멋대로의 내 시선에 더욱 더 불편함을 느꼈다. 영화 속 인물보다 도덕적으로 상위에 있다고 기세등등하던 나 또한 영화가 진행될수록 끔찍해지는 시선을 느끼며, 세상 때에 많이 찌든 속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속물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