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보단 직무 능력, 스토리, 창의성을 본다는 ‘스펙 초월 채용’이 확산된다. 지난달 1일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고용노동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17개 기관은 ‘스펙초월 채용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스펙을 초월하여 열린 채용을 하겠다는 취지다. 스펙 쌓기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이제야 조금은 귀에 들어온 모양이다.

청년들은 어떻게든 취업을 해보고자 토익 점수를 올리고, 자격증을 따고,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인턴 생활을 했다. 취업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없어도, 스펙이 없는 것보다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스펙을 마구 쌓았다. 그러나 좁은 취업문이 넓어질 리는 없었다. 오히려 취업문은 더 좁아졌다. 20대의 취업 비중은 1990년에 26.4%였으나 2010년에는 15.3%까지 떨어졌다. '고스펙'을 갖춰도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일이 잦아졌다. 더불어 취업만 생각하고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 또 뭘 시키시려고? ⓒ연합뉴스


‘스펙 초월 채용’은 얼핏 보면 스펙과의 전쟁에서 지친 청년들을 구원해줄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스펙 초월 채용’은 청년들이 정복해야 할 새로운 산이다. 쌓아야 할 스펙이 더 늘어난 것이다. 한국남동발전은 2013년 고졸 인턴 모집 때 SNS 미션수행으로 서류 전형을 대체했다. 서류에 쓰여 있는 스펙 대신 직무 능력과 열정 등을 보겠다는 ‘스펙 초월 채용’이었다. 그런데 SNS 미션의 내용을 보면 차라리 서류 전형이 나아 보인다. 4주에 걸쳐 4가지 주제에 대해 UCC, PPT를 만드는 미션이었다. UCC를 만들지 못하면 바로 탈락인 것이다. 청년들은 이제 UCC를 만드는 방법도 익혀야 하고, PPT 제작도 스티브 잡스 뺨치게 해야 한다.

이색 채용이라 불리는 다른 ‘스펙 초월 채용’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채용 방식을 통해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청년들 입장에서 보면 준비할 거리가 더 늘어날 뿐이다. 현대자동차에선 ‘5분 자기 PR’을 통과한 청년들에게 서류 전형 면제의 혜택을 줬다. 기아자동차에선 자동차 관련 파워블로거, 경진대회 및 공모전 수상자 등을 오디션 면접으로 채용하는 ‘스카우트 K’를 신설했다. 청년들은 이제 자기 PR 연습을 해야 하고, 파워블로거가 돼야 하며, 오디션 면접에도 대비해야 한다.

파워블로거, 공모전 수상은 스펙 아닌가요? ⓒhttp://recruit.kia.co.kr/


또한, 채용 방식이 다양해지며 취업 준비에 혼란이 더해졌다. 스펙으로 평가를 받을 때는 쌓은 스펙을 어느 회사 지원서에든 활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스펙 초월 채용’ 방식은 회사마다 다르므로 그럴 수 없다. 준비를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하는지도 막막하다. 토익은 점수가 높으면 좋고, 봉사활동은 많이 할수록 좋고, 자격증도 많을수록 좋다. 물론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는 막막하지만 ‘스펙 초월 채용’에 비할 바는 아니다. 어떤 UCC, PPT, 5분 자기 PR이 훌륭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다. 좋은 직무 능력, 스토리, 창의성이란 도대체 뭘까?

문제의 핵심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면, 채용 방식을 어떻게 바꾸든 청년들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물가와 집값은 계속 오르지만, 사회안전망은 부실해지고 있다. 번듯한 첫 직장을 구하지 못했을 때 겪게 될 팍팍한 삶은 누구든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연봉이 일정 수준 이상이며 안정적인 직장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스펙을 중요시하든, 스펙을 초월하든 취업이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한 경쟁 구조는 변치 않는다. 아무리 많은 청년이 열정적이고 꿈이나 끼가 있어도,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숫자는 정해져 있다. 이는 청년들의 고군분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거나, 사회 안전망이 두터워지는 식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