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20대’라는 기간에는 개인의 한 평생의 씨앗이 담겨있다. 20대의 내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쌓이고 얽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씨앗’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기 위해, 그들의 20대를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그 두 번째 인물은,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한 ‘김한길’ 민주당 대표다.


김한길의 위기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맞서 노숙투쟁에 이어 대표직까지 걸고 싸우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다. 대통령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새누리당도 적극적으로 민주당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 모든 사안에 민주당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으면서, 자연히 '제 1야당이 지금 하는 일이 뭐냐'는 비난이 들린다. 김한길 대표 체제의 위기설도 이제는 익숙한 얘기다. 최근에는 문재인 전 대선후보도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안철수 의원도 신당 창당을 공언하면서 김한길 대표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민주당의 김한길 체제에 미래는 없을까. 김한길은 정녕 무능한 대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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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의 글이 김한길을 대변한다

김한길 대표의 아버지는 유신정권시절 유일한 혁신정당이던 통일사회당의 대표였다. 때문에 대학시절에도 그는 중앙정보부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고, 때문에 그는 대학시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동기인 송영석 도서출판 해냄 대표는 "그의 흑석동 산꼭대기 집에 처음 갔을 때 방안 가득 쌓인 엄청난 책 무더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대단한 독서량이었다."고 회상했다. 창작활동도 왕성했다. 20대에 발표한 '병정일기'와 '대학일기', 그를 등단하게 했던 소설 '바람과 박제', 30대 시절 발표한 '미국일기'와 연간 삼백만 부가 넘게 팔렸던 베스트셀러이자 그의 대표작 '여자의 남자'까지 그의 글에는 김한길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오전에는 수료식에서 번쩍거리는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다. 이제야 진짜 군인이 된 것이다. 험상궂은 표정과 욕설과 발길질 속에, 혹은 점잖은 공갈 속에, 우리는 차츰 옷을 벗어가며 군대를 배웠다. 줄지어 걷는 것을 배웠고, 틀려도 다 똑같이 틀리기만 하면 괜찮은 군가를 배웠다. 총 쏘는 것을 배우고 수십 가지 기합의 체위를 배웠다. 남보다 편할 수 있는 요령을 괜한 상소리를 배웠다. 얄팍한 거짓 웃음과 애교를 배웠다. 그리고 분노를 배웠다. 그것을 삭이는 인내를 배웠다. 지쳐 쓰러진 친구가 뺨 맞는 것을 차려 자세로 지켜보면서, 영하 18도의 새벽 2시에 팬티 바람으로 기어 언 땅을 녹이면서 우리는 증오와 굴종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겨우 이등병이 된 것이다. 장군이 되려면 무엇을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가." 

- 병정일기 中


김한길이 처음 발표한 글은 '병정일기'다. 자신이 겪은 군생활을 담담한 어투로 풀어낸 '병정일기'는 당시의 군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글로 평가 받았다. 작가 한수산은 '병정일기'를 두고 "우리는 6·25 이후 수십 년간 이만한 병영문학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역 후 발표한 '대학일기'에는 전역 후 그의 대학생활이 담겨있으며 지금의 대학생들도 공감할만한 고뇌와 사색을 찾아볼 수 있다. 청년 김한길은 글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지만 동시에 그의 글 탓에 우리나라를 떠나야 했다. 중앙정보부가 '병정일기' 를 트집잡아 그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이유였다.

미국에서 김한길은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밤에는 주유소에서 일하며 힘든 삶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일기는 '미국일기'란 이름으로 발표된다. 김한길은 이후 미국에서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와 중앙일보 미주지사 사장을 역임하며 그가 가진 글의 힘을 인정받는다.

"군복을 벗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해야 할 일조차 없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런 불행을 안고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그 사이에 겪은 숱한 역겨움과 망설임, 몇 번인가의 공허한 연애, 묻혀진 하소연들... 나는 절반쯤 어른이 되어 있었고, 차츰 대학생 티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 김한길, 대학일기 中


젊은 시절 김한길의 다독과 다작은 그가 87년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다. 그의 소설 '여자의 남자'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유명 토크쇼를 진행했으며, 방송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어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되며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김한길은 지역연고도 없고, 고등학교나 대학인맥, 운동권 계파조차 없다. 이런 그가 청와대 수석과 장관, 국회의원을 두루 거쳐 민주당 대표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그의 다독과 다작, 여기에서 비롯한 필력과 언변에서 찾을 수 있다.

김한길의 필력과 언변은 통찰력으로 이어지고, 이후 그의 정치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한길은 57회에 달했던 TV대선토론을 총지휘하며 DJ의 신뢰를 얻는다. 방송경력과 작가 출신의 표현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15대 대선에서는 DJ의 이미지메이킹을 총괄했고, 16대 대선에서도 기획특보 겸 미디어 선거본부장으로서 당선에 큰 공을 세운다.

당시 노무현 당선자의 주변 참모는 "김한길의 브리핑은 예술이다. 복잡한 상황도 간결하게 정리해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며,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변변치 않은 아이디어도 그의 손을 거치면 근사하게 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과거 “그는 매우 깊이 있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며 “같은 사안도 뛰어난 분석력을 바탕으로 조각이 아닌 전체로 이해하여, 그 인과관계와 사회적 의미까지 입체적으로 밝혀낸다. '역시 작가 출신은 다르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고 그를 표현했다. 두 명의 대통령을 당선시킨 김한길은 이후 꾸준히 성공적인 정치인생을 보낸다.
 

"염려 말아요, 아가씨. 나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테니까. 끈질기게 살아남고야 말테니까." 

- 미국일기 中 

 
빈민가 아르바이트생에서 기자로, 방송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국회의원과 장관, 민주당 대표까지 승승장구해온 그가 또 하나의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 김한길의 생애는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던 도전이었다. 그러나 김한길은 그의 문체처럼 모든 도전을 담담히 이겨나갔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방송으로도 인기를 끌었으며, 두 번의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김한길이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요구, 기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지금의 김한길 대표를 만든 이런 통찰력으로, 지금 그가 마주한 역경 역시 이겨내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