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로 남을 의식한다. 남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이는 옷은 물론이거니와, 휴대전화, MP3, 심지어 들고 다니는 신문까지 다른 사람들이 이 물건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문제를 얘기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남을 의식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의식하게 만드는 다른 시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충분히 가혹하기에, 그 시선을 피하기 . 위해 사람들은 ‘최신의’, 그러나 ‘심하게 튀지는 않는’ 패션을 찾기 위해 다분히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패션을 예리하게 바라보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우리는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것은 ‘아직 뭘 모르는’ 행위라느니, 어떤 스타일의 옷은 철 지난 유행인데 아직까지 입는 것은 문제라느니 하는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은 단순히 비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옷을 입는 사람들을 ‘찌질이’로 전락시킨다. 조금 더 구체화 된 예를 드는 경우도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어떠어떠한 패션을 입은 사람’의 옆 자리에는 앉기도 싫다는 내용이나,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목늘어난 티셔츠를 입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허세 섞인 글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역시 대상자를 ‘패션 문외한’으로 공격하는 것은 위와 다르지 않다.

 ‘남들이 무얼 입든 그것을 비하하는 것은 진정한 패셔니스타의 모습이 아니다’라는 말은 잠시 제쳐두려고 한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권력에 관한 문제를 말하려고 한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명제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야만 규정’을 ‘타자화’로 정의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러한 시선의 권력 문제를 역사적으로 명확히 나타낸 사람이다. 그는 동양의 본질적 특성에는 상관없이 단순히 ‘야만적’이고 ‘미개’하다는 이미지를 씌움으로 그들을 서양과는 다른 것(타자, 他者)로 만들어버리고, 이에 따라 자신들의 우월함을 나타내고 그들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다. 푸코나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 역시 ‘남을 경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권력’이 부여된다고 말하였다. 푸코는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의 본질 역시 ‘시선의 일방성’에서 나오는 ‘권력’으로 보았다. 볼 수는 없고 보이기만 할 뿐인 죄수들은 보이지는 않고 볼 수 있는 간수에 비해 열등한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헐리우드의 스타 린제이 로한과 지나가던 복학생      



 따라서 ‘옷 깨나 잘 입는다는 사람들’이 ‘찌질이’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 역시 그들간의 잠재적 권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인류의 발전은 권력 관계 청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백 년간 지속되었던 왕과 백성의 권력관계는 청산되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유럽의 정신적 권력관계였던 신과 인간의 권력관계 역시 무너졌다. 그렇게 조금씩 권력관계는 청산되어왔고, 현대는 무(無) 권력의 시대여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양성의 인정’이라는 다분히 현대적인 테제로 이어진다. 그렇다. 이것이 권력 관계 형성의 가장 큰 문제이다. 권력 관계가, 특히 다양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는 부분에서 특정 방식이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다양성의 훼손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문제를 가진다. 그래서, 패션에서의 권력 관계는 악(惡)이다.

 진부한 주장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남들이 무얼 입든 그것을 비하하는 것은 진정한 패셔니스타의 모습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패션을 비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 관계를 생성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다양성을 훼손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또 다른 독창성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독선과 아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