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대학로는 젊음과 예술의 공간으로 대표된다. 많은 대학교와 인접해 있고 연극과 거리예술로 가득하다. 이 뿐 아니라 창경궁, 낙산공원, 이화동 벽화마을까지 존재하기 때문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나 휴일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꼽힌다. 젊음과 예술의 기운으로 넘쳐나는 이곳에 ‘필리핀 시장’이 있다. 혜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필리핀 시장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필리핀 시장은 혜화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혜화역 1번출구로 나와 걷다보면 동성 중・고교 정문이 보이는데, 여기를 시작으로 약 100미터 정도 줄지어있는 초록색 파라솔 노점상들이 바로 필리핀 시장이다. 혜화역을 지나 필리핀 시장에 가까워질수록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카페와 옷가게들이 즐비한 혜화역 근처는 젊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는 반면 필리핀 시장에 가까워질수록 들리는 말소리도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외국인 못지 않게 한국인이 즐비한 이태원을 생각하며 방문한 필리핀 시장은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100미터 남짓한 시장 거리에서 한국인을 찾는 것은 힘들었다. 주변에 인접한 관광지들과 대학로라는 거리의 특성상 시장 손님들이 거의 한국인일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필리핀 시장 안에서는 판매하는 사람도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도 거의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시장을 돌아보는 동안 발견할 수 있었던 한국인들은 필리핀 음식을 먹고 있었던 가족뿐이었다.
들리는 소리도 시장을 들어서기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귀를 가득 메우던 한국어와 거리를 울리던 대중가요의 소리는 없어지고 시장 거리는 필리핀 말소리로 가득 찼다. 간판 역할을 하는 박스에 있던 글씨부터 흥정까지 필리핀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단출한 이곳이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이유를 피부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관광지라고 예상했던 생각은 금세 잊혀졌다. 정말 삶의 터전인 시장이었다. 필리핀에서 쓰는 세제와 샴푸를 비롯한 각종 생필품과 생선, 고기, 채소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전자기기나 필리핀의 대표적인 간식거리, 과자와 과일 등을 팔고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노점에 전자기기나 생선을 파는 노점 빼고는 파는 품목이 겹치기도 했다. 동일한 품목에서 가격 경쟁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든 노점의 가격은 동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며 눈치 볼 일이 없어 보였다.
흥정이 끝난 후에는 익숙한 듯 양손 가득 장을 본 필리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상인들과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실제로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서로를 보고 인사를 하고 손님이 없는 경우에는 꽤 오래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리틀 마닐라에서 그들은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고향 친구 관계를 이어가는 듯 했다.
필리핀 말소리와 그들만의 유대에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한국어를 쓰는 것이 동떨어진 기분을 가져다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시장을 구경하고 음식을 사서 먹는 한국인에게 상인들은 종종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고 천천히 먹으라며 배려를 보이기도 했다. 신발끈이 풀린 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구경하기 바빴던 기자에게도 “신발끈, 신발끈”을 외치며 친절을 베풀었다.
혜화 안의 작은 필리핀 시장은 이질의 공간이자 동질의 공간이다. 혜화라는 장소의 특성과 필리핀 시장은 확실히 다르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대학로와 필리핀 시장은 말소리부터 사람들까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이국적이며 이색적이다. 하지만 그 속의 필리핀 사람들은 유대를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낯설 수밖에 없는 타국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향수를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낯설어 할 필요는 없다. 간간히 들리는 한국어, 만국 공통의 흥정과 살아가는 모습에 어쩔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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